[발언대]30만권, 내다 버리는 게 능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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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30만권, 내다 버리는 게 능사인가
  • 경상일보
  • 승인 2023.11.1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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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영진 울산 중구의회 의원

‘포쇄’는 책을 말리는 일이다. 포쇄관은 서고에서 일일이 책을 꺼내 볕과 바람을 쐬게 하는 관직이었다. 습기를 말리고, 냄새를 날리며, 벌레를 털어냈다. 조선왕조실록과 팔만대장경판도 포쇄를 통해 소중히 다뤄졌다. 그 덕에 지금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서 인류사에 길이 남을 보물이 됐다.

요즘 울산 중구는 대표 도서관을 짓고 있다. 내년 6월 개관한다. 도서관 이름은 주민선호도 조사를 거쳐 ‘종갓집도서관’으로 결정됐다. 기존의 중부도서관을 옮기면서 이름까지 바꾼 것이다. 중부도서관은 그동안 교육청이 위탁 관리해 왔는데, 새로 짓는 도서관은 중구 직영체제로 바뀐다. 교육청은 오는 12월까지 인수인계를 마친 뒤 도서관에서 손을 떼는 수순을 밟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작은 문제가 불거진 것 같다. 중부도서관에는 밖으로 내놓지 못하고 창고 안에 가둬놓은 책이 너무 많았다. 보유도서 30만권 중 6만권만 자료실(열람실)에 비치됐고, 나머지 24만권은 울산 남구 여천천변 울산도서관 지하(보존서고)에 보관중이다. 교육청은 이 모든 책을 중구가 떠안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중구는 거부했다. 6만권 정도는 어찌해 보겠지만 24만권에 대한 자료정리와 사후처리는 수 십 년간 도서관을 관리했던 교육청이 결자해지하라는 입장이다.

중구의 고민은 이해되는 면이 있다. 새 도서관은 묵은 책을 진열하거나 보관할 자리가 부족하다.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수십년 된 낡은 책이라 주민들도 외면할 것 같다. 공공도서관의 도서대출자들은 대개 5년 이내 출판물을 선호한다는 조사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무엇보다 도서관 대출용 책으로 만들려면 전자식 바코드작업(RFID)을 해야 하는데, 권당 1840원이나 소요되는 예산이 들어가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30만권이 폐기될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돈다. 최근 전국 곳곳 대학도서관들이 오래 된 책을 정리하겠다고 나서자 일각에서 이를 ‘책장례식’이라 칭하며 논란이 되었는데, 중부도서관 역시 똑같은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는 추론이다.

하지만 사립대와 공공도서관은 엄연히 다르다. 울산도서관에 있는 24만권이야말로 1984년 개관한 중부도서관의 역사다. 향토지와 지역문인 작품집이 들어있다. 시대별 출판흐름을 보여준다. 40년 세월의 책무덤 속에는 한순간 잊혀진, 혹은 우리가 미처 모르는 보석이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최근 언론인, 문인, 공무원, 시낭송가, 독서광 등 중부도서관을 추억하는 구민들을 만났다. 교육청과 구청의 떠넘기기 공방을 듣고, 이들은 공공의 재산이 마구잡이 폐기될까 걱정했다. 두 기관의 외면으로 소중한 책들이 곰팡이나 좀에 쏠려 결국엔 썩어 문드러질 것이라 한탄했다. 다만 울산도서관 보존서고 환경은 항간의 우려와 다르니 그 점만큼은 기우라고 알려줬다. 필자가 실제 방문하여 육안으로 살펴본 결과 유행이 한참 지난 도서가 많을 뿐 상태가 나쁜 책이 많은 건 아니었다.

울산의 책사랑꾼들은 더 이상 꾸물대지 말고 도서목록이라도 하루빨리 공개하라 재촉이다. 책을 옮겨 먼지를 털고 이를 정리하는 작업이 힘에 부친다면 기꺼이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한다. 독서주간이나 책의 날, 혹은 새 도서관이 개관하는 날도 괜찮겠다. 볕과 바람이 좋은 날을 골라 야외에서 헌 책을 나누는 행사라도 치르기를 바랐다. 무려 30만권 공공재산을 처분하는데 그 정도의 절차는 필요하지 않겠느냐 입을 모은다.

새 도서관이 문을 연다. 변하지 않는 삶의 지혜와 시대에 유용한 지식을 담는 곳이다. 여느 기관과는 달라야 한다. 현대판 포쇄의 장을 열어 우리 동네 품격을 우리가 세우도록 해주면 어떻겠는가. 주민들이 선택한 ‘종갓집도서관’ 간판에 꼭 들어맞도록 말이다.

홍영진 울산 중구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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