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태어났다는 땅에 귀를 대볼 것이다.
영월의 장르가 생길 것이다.
물도 없고
구름도 없고
나무도 없는 중성의 세계에서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늘 길 위에 있을 것이다.
점퍼를 입은 사람들을 볼 것이다.
새로 발행된 지폐의 냄새를 맡지 않을 것이다.
윤리를 잊을 것이다.
늘 어지러운 바닥에 누울 것이다.
친구들을 오래 안 만날 것이다.
창밖의 두런거리는 소리를
오래 들을 것이다.
무를 수도 없는 사랑을 하고
구름과 약속할 것이다.
세상의 고아가 되어
명왕성의 시민이 될 것이다.
언젠간 도시 떠나 유유자적하겠다는 다짐

오래전 영월에 가서 단종 유배지인 청령포를 보고 온 적이 있다. 청령포를 휘도는 서강이 하도 맑고 고요해서 그때 영월(寧越)은 정성스레 달을 맞는 영월(迎月)과 같았다.
‘내가 태어났다는 땅’이란 표현을 보니 시인의 고향이 영월인가 보다. 하지만 시인은 지금 물, 구름, 나무도 없는 ‘중성의 세계’, 그러니까 자연과 거리가 먼 도시에 살고 있다. 그러니 ‘영월의 장르’란 고향을 떠나 그곳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만들어가는, 혹은 그들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땅에 귀를 댄다는 것은 대지에 가장 가까이,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것. 시인은 그곳에서 자본의 논리나 세속의 규범을 벗어던지고 친구들과의 연락도 끊고 내면으로 침잠하고 싶어 한다. ‘창밖의 두런거리는 소리’는 잃어버린 물, 구름, 나무의 소리일 테니 자연과 더불어 한가롭기를 꿈꾼다. 명왕성은 태양계에서 행성의 지위를 잃은 왜행성으로, 명왕성의 시민이 된다는 것은 ‘늘 길 위에 있’는 우주의 방랑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다.
그렇다. 바람이다. ‘~할 것이다’는 미래시제로 시인의 갈망일 뿐 아직 실현된 것은 아니므로. 하여 영월이란 단순히 지도상의 지명이 아니라 <무진기행>의 ‘무진’과 같은 탈일상의 공간, 하나의 피난처, 시인이 꿈꾸는 샹그릴라가 아닐지.
송은숙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