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 내고자 창을 내고자 이내 가슴에 창 내고자
고모장지 세살장지 들장지 열장지 암톨쩌귀 수톨쩌귀 배목걸쇠 크나 큰 장도리로 뚝딱 박아 이내 가슴에 창 내고자
이따금 하 답답할 제면 여닫아 볼까 하노라
극에 달한 답답함을 푸념섞인 회한으로 읊어
얼마나 가슴 답답하면 큰 장도리로 암톨쩌귀 수톨쩌귀 뚝딱 박아 가슴에 창을 내고자 했을까. 그것도 스르륵 어는 미닫이창이 아닌 여닫이창을 내어 확! 화들짝 열어젖히고 싶었을까.

예나 이제나 사람살이 가슴 답답한 일, 없을 수는 없는 일. 초장에서 가슴에 창을 내는 불가능한 상황을 설정하고 중장에선 창을 만드는 일상적 사물들을 반복하여 생활 상황을 과장함으로써 해학성을 높혀 놓고 종장에선 ‘이따금 하 답답할 제면’으로 종장 첫째 구 3음절을 지켜주었고 둘째 구 5~7자를 ‘하 답답할 제면’이라고 표현해 절묘하게 시조의 율격을 지키면서도 답답함을 최고의 언어로 구사했다. 너무 답답한 것도 그냥 답답한 것도 아닌, ‘하 답답할 제면’이 얼마나 간결하면서도 우리말의 절묘한 표현인가. ‘하’자로 해 답답함을 최고조로 올려놓고 가슴에 창을 열어젖혀 보고 싶었을까.
말맛에 말 부림을 살려 심중을 읊어가는 해학과 낭만, 억울함과 답답함을 노래한 것이다.
굳이 이름을 밝힐 것도, 얹을 것도 없거니와 구태여 시조작품이라 용을 쓰고 지은 것도 아닌 그야말로 푸념 섞인 회한을 자연스레 입에 익은 말로 몸에 젖은 가락으로 시조를 읊었을 따름이다.
작자 미상의 해학적 풍자를 한 사설시조가 이름 없는 평민들과 부녀자들 사이에서 기발한 말솜씨로 구사돼 전한다.
시조는 조선 후기에 오면서 대체로 중장이 길어지는 사설시조를 통해 솔직함을 드러낸다. 원인이 무엇이든 정말 답답함이 극에 달해서 어찌할 바 모를 때, 이 시조를 통해 가슴 뻥 뚫리는 그 무엇이 새해에는 만사람 앞에 열리기를 소망한다.
답답함의 원인도 창을 열어젖히는 당사자도 이 작품을 읽는 우리의 몫이다. 삶의 좌절을 누그러뜨려 누구든 어떻게든 해석 가능하도록 문을 열어 두고 있다. 이것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문학 작품이 생명을 갖는 이유이다. 한분옥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