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고영민 ‘수필’
상태바
[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고영민 ‘수필’
  • 차형석 기자
  • 승인 2024.05.20 0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씨감자는 반을 잘라서 묻지
자른 곳에 검은 재를 발라서 묻지
그리고 잊어먹지

공들여 잊어먹지
이마를 짚어주고 가던 손을 잊지
옆의 흙을 가져와 묻어주던 시간을 아예 잊어먹지
아니, 아주 잊어먹지 않을 만큼만 잊어먹지
눈매에서 싹이 오르지
아주 잊어먹지 않을 만큼만 싹이 오르지, 꽃이 피지

잘려나간 반을 흙 속에서 생각하지
눈 감고 오래도록 생각하지
들키고 싶지 않을 만큼만 공들여 생각하지
그 사이 반이 하나가 되지
공들여 하나가 되지

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 되고
마음 가는대로
열이 되지



공들여 감자 키우듯 공들여 수필도 풀어내

▲ 송은숙 시인
▲ 송은숙 시인

수필 쓰는 일을 감자 농사에 빗대어 쓴 시이다.(역으로 감자 농사를 수필 쓰는 일로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감자는 다른 식물과 다르게 몸을 잘라서 흙에 심는다. 씨감자를 묻는다는 것은 몸을 자르는 고통을 다독이며 흙으로 들어가는 낯설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강렬한 기억은 차츰 잊히고 의식의 저편으로 가물가물 사라진다. 그러다 어떤 일을 계기로 문득 기억은 새롭게 되살아난다. 감자의 싹처럼 기억이 싹트기 시작한다.

감자에 빗대자면 그건 잘려 나간 반을 생각하는 일이다. 잊되, 아주 잊은 것은 아니어서 곰곰 반추하면 기억은 제 꼴을 갖추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는 책상 앞에 앉아 그 기억의 색깔과 냄새와 형태를 되짚으며 뜻과 의미를 찾아 글로 표현하고 싶어진다. 그것이 수필이다. 이제 기억은 글을 통해 다른 사람과 공유되어 하나의 기억은 둘이 되고, 셋이 되고, 열이 된다. 땅속에서 감자가 자라 한 알의 감자가 둘, 셋, 열 개의 감자가 되는 것처럼. 이 시에는 공들인다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온다. 글을 쓰는 일, 기억을 되새기고 풀어내는 일은 감자 농사를 짓듯 이런 공들임이 필요하다. 공들이다. 정성과 노력을 많이 들이다.

송은숙 시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대형 개발로 울산 해양관광 재도약 모색
  • [기자수첩]폭염 속 무너지는 질서…여름철 도시의 민낯
  • 신입공채 돌연 중단…투자 외 지출 줄이고…생산직 권고사직…허리띠 졸라매는 울산 석유화학업계
  • 아마존·SK, 7조규모 AI데이터센터 울산에
  • 울산, 75세이상 버스 무료 교통카드 발급 순항
  • 방어진항 쓰레기로 ‘몸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