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부분 의병 전투는 자료나 기록이 거의 없고, 후손 조차 드물어 기억에서 소멸된 역사라고도까지 불린다.
오는 6월1일 의병의날을 앞두고 있지만, 울산에서 의병 전투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낮은 실정이다. 당시 일본군이 남긴 자료와 신문기사 등을 토대로 그날의 역사를 꺼내본다.
지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국에 혼란이 더해졌다. 울산에서도 크고 작은 의병 활동이 시작됐다.
이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1908년 3월19일 벌어진 언양읍성 전투다. 당시 일본군 진중일지와 일본 경찰서 보고 내용 등에 따르면 윤만파 화산대 의병부대 등 100명이 언양읍성을 습격했다.
당시 일본 병력은 경찰과 군을 포함해 38명 가량이었다. 의병들의 기습에 언양 순사들의 총알은 단번에 떨어졌다. 이에 일본군은 경주와 부산 등에서 병력을 추가로 투입했다.
6시간의 전투 말미에는 일본군의 총알까지 떨어질 정도로 치열했다. 전투가 끝난 뒤 읍성 안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됐다. 읍성에 있던 30여채의 건물 중 주요 관공서 등 12채가 불에 탔다. 민간인 피해는 없었지만 의병 20명 가량이 순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은 군인 1명, 일본인 여성 1명이 사망했다.
이 의병 전투는 이후 인근 경주와 울주지역으로 번져 4월까지 이어졌다. 당시 울산에서는 10명 가량인 김기준 의병부대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대다수 의병들은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활동했다. 주요 활동지는 울산 동해안 주변이었다.
이처럼 언양읍성 전투는 그간의 의병 활동과 성격이 달랐다. 하지만 울산 의병 전투의 큰 획을 그었음에도 언양읍성 전투에 대한 관심은 높지 않다.
의병장을 제외한 대다수 의병은 평민이었다. 전투 중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아 남아있는 후손도 거의 없다. 또 불시에 일어난 전투를 기록하기도 쉽지 않아 일본 측 기록과 재판 기록 등을 통해 확인하는 게 최선이다.
때문에 항일독립운동과 잘 연계되지 않아 의병 정신에 대해서도 잊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30일 항일독립운동연구소에 따르면 한국 보훈 증자 사료관에 오른 울산 출신 의병 관련 인물은 김기준 등 7명이 전부다. 모두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인물이다.
이병길 항일독립운동연구소장은 “언양읍성 전투는 울산 1~2세대 독립운동가의 탄생을 부른 울산 독립운동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며 “언양읍성 외형만 복원할 게 아니라 관련 역사도 함께 복원해야 한다”고 밝혔다. 강민형기자 min007@ks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