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동정벌을 나섰다가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가 몰락하는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다.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체제를 잡기위해 많은 피를 보았다. 그때가 1392년, 지금부터 632년 전이다. 그 조선이 1910년 경술국치까지 27왕 518년을 이어왔고 그 후 오늘까지 114년이 흘렀다.
당파싸움으로 점철된 조선의 역사는 가관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고 집안싸움만 한 것이다. 조선 초,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은 유학자(신진사대부 온건파)를 중심으로 향촌에서 학문에 임했던 집단이 사림파(士林派)다. 유학(儒學)은 불교와 달라서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정치에 참여하는 유학자들이 많았다. 충과 효를 강조한 유학은 왕권을 강화하는 통치의 이론으로 맞았다. 이미 정치적 세력을 잡고 있었던 훈구파(勳舊派)와 신진 사림파 사이에 의견 대립이 자주 일어났다.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좌를 차지한 세조(世祖)가 문제였다. 세조 때부터 파벌과 대립이 본격화되었고 큰 다툼으로 죽고 다친 일이 사화(士禍)다.
세조부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인조, 명종의 100년 동안 당쟁이 극심했다. 연산군이 즉위 4년(1498)에 역사 기록을 그릇되게 썼다는 이유로 많은 학자들을 죽인 사건이 무오(戊午)사화다. 무오사화는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연산군을 꼬드겨 일어난 일이다. 6년 후 연산군 10년(1504) 갑자년에 연산군은 억울하게 죽은 생모, 폐비 윤씨를 복위하려는데 저항을 받자 다시 많은 선비를 죽였다. 소설 ‘금삼의 피’가 이 야기다. 금삼(錦衫)은 비단 저고리다. 이 갑자사화는 훈구파의 보복이었지만 훈구파도 많이 당했다. 연산군 12년(1506)에 폭정을 일삼는 연산군을 몰아내고, 그의 이복동생인 중종을 옹립한 것이 중종반정(中宗反正)이다. 연산군을 쫓아낸 중종(中宗)은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 학자를 등용해, 정계를 쇄신하며 미신을 타파하고 미풍양속을 기르고자 향약(鄕約)을 실시했다. 새로 집권한 왕이 직접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연산군에게 불만을 품은 신하들이 연합해 일어난 반정이다.
연산군 축출 이후 중앙 정계에 진출했던 진보적 사림파들이 대부분의 권력을 장악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중종이 이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중종 14년, 기묘년(1519)에 일으킨 것이 기묘(己卯)사화다. 조광조 등이 제거되었다. 인조를 건너 명종(明宗) 때에는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외척 간에 반목과 암투를 계속하다가 또 여러 선비가 화를 입은 을사(乙巳)사화가 있었다. 을사사화는 명종 즉위년(1545)에 대윤(윤임)과 소윤(윤원형)이 충돌한 끝에 소윤이 승리해 대윤 일파가 모조리 숙청된 것을 말한다. 이렇게 집안싸움만 하다가 외세를 보지 못하고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가야하는 임진왜란(1592)을 겪게 된다. 조선이 개국한지 딱 200년만이다. 참으로 어리석고 어처구니없는 그 모습, 붕당과 집안싸움이 임진왜란으로부터 532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하다. 참으로 전통을 잘 계승하는 민족이고 나라다.
1910년의 경술국치 9년 뒤인 1919년 3월1일, 민족자결의 기미 독립만세를 불렀고 수많은 독립군들이 초개같이 목숨을 바쳤다. 해방까지 36년간이다. 1919년 4월11일, 일제치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것이 1945년 8월15일 정오다. 해방이 되고 독립을 하고 광복을 맞은 것이다. 남한은 해방 3년 후인, 1948년 8월15일에 총선거를 통해 초대 국회를 구성했고 국회의원들의 간접 선거로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정식 정부가 되었다.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곧 북의 남침으로 6·25가 터지지 않았던가? 그게 1950년이고 유엔군이 돕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공산치하에 살고 있을 것이다. 1·4후퇴쯤에 미국은 왜 리틀보이(원폭) 한 방을 아꼈을까? 역사를 바꿀 수가 있었는데…. 며칠 전의 광복절은 79주년이다. 분명, 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은 것이다. 아시다시피 광복회는 정부가 여는 광복절 경축식과는 달리 따로 경축식을 열었고 야당은 그리로 갔다. 그래야만 했을까?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이 있다. 또 건국절이 필요한가? 건국절이 필요한지와 필요하다면 언제인지는 학자들이 연구하고 합의를 이루어 국민들이 동의하는 것이 순서다. 서두를 일이 아니다. 그동안 일본과 중국에 얼마나 당했나? 나라는 입으로 말고 힘으로 지키는 것이다. 지키기는 어려워도 망하기는 쉽고.
조기조 경남대 명예교수·경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