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5년 12월3일. 대한민국 11·12대 대통령(1980년 9월1일~1988년 2월24일)을 지낸 전두환. 5공화국 신군부의 우두머리 격인 그는 전날 자신의 서울 연희동 집에서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내려왔다. 최측근 장세동과 안현태 등을 대동, 체포영장을 전면 거부하는 골목 성명서를 낭독한 뒤였다. 문민정부 YS(김영삼 대통령)와 정면으로 맞닥뜨린 전두환은 체포영장을 집행하려는 검찰 지휘부와 마라톤 대치를 이어갔다. 국내 언론은 물론 CNN을 비롯한 외신들도 전현직 대통령의 충돌 장면을 24시간 생중계로 내보냈다. 합천 청년회를 비롯한 수백명의 주민들은 전두환 체포영장 집행을 저지하면서 극렬 저항했다. 영장을 집행하려는 수사관들과 전두환 측근들의 날카로운 심리전이 펼쳐졌다. 정치부 기자로 현장취재를 맡았던 필자는 운 좋게도 사전에 경남경찰청 수사관들과 함께 뒷방 입구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오전 6시. 영장을 든 수사관들이 전두환이 머무는 방으로 들어갔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방문이 열렸다. 전두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20여 시간 합천 대치극이 막을 내린 순간이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으로 ‘세계 속의 코리아’로 우뚝 섰던 대한민국의 위상은 7년이 지난 뒤 직전 대통령의 구속 드라마가 전 세계에 생중계되면서 급추락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25년 1월3일 금요일.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현직 대통령의 체포를 둘러싸고 극한 대치극이 벌어졌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수사관들과 경찰이 윤석열 대통령 관저인 서울 한남동에 집결했다. 윤 대통령 체포영장을 집행하기 위한 고도의 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용산 대통령실을 출입하는 필자 역시 역사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대통령 경호처 요원들이 인간 방패와 차량으로 바리케이드를 구축, 공수처와 경찰의 진입을 원천 차단했다. 경호처가 인간 스크럼과 차량으로 구축한 2차 저지선은 뚫지 못해 5시간 이상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극한 대치극은 계속됐다. 공수처 검사 3명만 2차 저지선을 통과한 뒤 3차 저지선까지 이동해 변호인단에 체포영장을 제시했다. 경호처 차량 등으로 구축한 바리케이드에 막혀 진입에 실패했다. 결국 체포영장 집행 5시간 반 만인 오후 1시30분경 체포영장 집행을 중지한 뒤 철수했다. 관저 앞에는 윤 대통령 지지자와 반대자가 극한 대치를 이어갔다. 유튜버들의 선동과 맞물려 관저 주변엔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CNN 등 외신들도 전 세계로 생중계하는 데 열을 올렸다.
이 지점에서 필자가 취재 현장에서 바라본 30년 전과 작금의 사태 공통점과 다른점은 크게 세 가지다.
직전과 현직 대통령의 차이일 뿐 최고 지도자의 품격은 완전 바닥이라는 데는 큰 차이가 없다. 다만 30년 전엔 여권의 중심부 YS의 강력한 개혁 의지로 전두환을 응징하는 데 앞장선 반면, 작금의 여권은 윤 대통령을 사수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 확연히 다르다. 때문에 윤 대통령 지킴이에 열중하는 국민의힘과, 윤 대통령을 하루라도 빨리 끌어내리려는데 전방위 대처에 나선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의 극한 대치가 국정을 더욱 혼란하게 만들고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여기다 정의와 불의를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분리하고, 위법 행태를 철저하게 응징해야 하는 법조계와 사회지도층 인사들마저 법 정신과 윤리성에 의문이 제기될 만큼 아전인수식으로 전락했다.
그렇다면 작금의 해법은 과연 없는 것일까?
12·3 비상계엄으로 위헌 시비와 내란수괴 혐의의 정점인 윤 대통령의 과감한 결단이다. “장수는 곁불을 쬐지 않는다” 대통령답게 당당하게 임할 때다. 여야 정치권은 ‘조기 대선’과 ‘대선 지연’ 유불리 계산속에서 정략적 공격 행태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 헌법재판소와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을 겨냥한 여론 선동 압박과 공격을 당장 멈춰야 한다. 산업수도 울산을 비롯한 전국의 경제가 추락을 넘어 망한 뒤엔 누가 대통령이 된들 대한민국의 성장엔진은 한동안 휘청거리게 될 것이다.
김두수 서울본부장 dusoo@ks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