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는 수많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울산이 지향하는 매력적인 도시란 그 도시만의 정체성을 담은 고유한 공간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이곳저곳에서 매력을 발휘할 때 가능하다. 모든 것이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지역의 정체성과 매력을 담은 다양한 공간이 발굴되고 만들어져야만 도시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울산의 역사와 문화, 특성과 매력, 그리고 울산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가 있는 ‘울산다운 공간’에 주목해야 할 이유다.
높이 솟아있는 공장 굴뚝과 실핏줄처럼 세밀하게 퍼져 있는 파이프라인, 거대한 골리앗 크레인과 해안을 가득 채운 자동차, 길게 늘어선 산업단지의 무표정한 경관들, 우리는 그것을 ‘울산답다’고 말한다. 그러한 울산다움을 고요히 담아낸 ‘울산다운 공간’이 있다. 바로 장생포문화창고다. 장생포문화창고는 수산물을 가공하던 세창냉동이 경영악화로 문을 닫은 후, 20년간 폐쇄되어 있던 냉동창고를 문화시설로 재생한 공간이다. 육체의 양식을 제공하던 수산물창고가 영혼의 양식을 제공하는 문화창고로 변신했다는 점이 역설적으로 느껴진다.
국내의 많은 도시에 그 지역의 폐쇄된 산업시설을 활기 넘치는 문화공간으로 재생한 사례들이 있다. 하지만 그 주변 환경은 완전히 도시화되어서 그 공간의 역사적, 장소적 맥락은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장생포문화창고는 아직도 활발하게 생산활동을 지속하는 산업단지와 어항의 교차점에 위치하여, 공간의 역사와 장소성 그리고 주변환경과의 맥락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색다른 매력이며 차별점이다.
한때 차가운 냉동의 기억을 품은 이 공간은 이제 따뜻한 문화공간으로 되살아났다. 생업의 고단함과 동결된 움직임이 가득했던 수산물창고가 오케스트라의 화려한 선율, 사람들의 훈훈한 이야기와 체온이 가득 찬 생명의 공간이 되었다.
이곳에서 가장 극적인 공간은 북카페다. 차가운 커피 한 잔과 따스한 온기를 품은 수필집을 들고 창가에 앉아, 액자처럼 걸려있는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는 그 경험은 경이롭다고 해도 과하지 않다. 창밖에는 거대하고 복잡한 근육질의 화학공단 설비들이 가득하고, 그 사이로 생명의 바다가 길게 뻗어 있으며, 저 멀리 이 모든 혼돈과 부조화를 감싸 안는 산맥과 하늘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강렬한 산업단지의 이미지와 잔잔한 해변의 풍경이 이질적이지 않고,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조화를 이룬다. 화학공단의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마저도, 이곳에서 바라보면 한 폭의 풍경화처럼 느껴진다. 누군가에게는 삭막하게 보이는 풍경일지 모르겠지만, 울산의 정체성과 기억이 응축된 울산다운 장면이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 커피 향 그리고 오묘한 바깥 풍경이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이 공간의 분위기는 울산의 여느 공간에서도 느끼기 어렵다. 성공적인 산업시설 도시재생 사례로 거론되는 서울 성수동 카페에서도, 부산 폐공장 서점에서도, 심지어 제주도 방앗간 베이커리에서도 이런 공간의 오마주(hommage)를 경험할 수 없다. 오직 울산만이 가질 수 있는 조형성과 풍경의 조화 그리고 이야기와 삶의 무게가 여기에 압축되어 있다.
장생포문화창고에 들어서면 자연과 산업, 과거와 현재, 기억과 상상이 겹친다. 마치 오래된 사진첩을 넘기듯, 울산이라는 도시의 깊은 면면들이 떠오른다. 고래잡이의 기억, 중화학 산업의 눈부신 성장,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경험하는 ‘울산다운 공간’의 특별한 기쁨까지.
장생포문화창고는 단순히 재생된 문화시설이 아니다. 그것은 울산이 어떻게 변화하고, 자신을 어떻게 재해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그 어떤 전시보다, 그 어떤 홍보 영상보다도 더 강력하고 명확하게 울산을 설명해 주는 장소다. 과거 울산의 일터였고, 지금은 사람들의 마음을 쉬게 해주는 쉼터인 이곳에서 울산의 미래를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울산의 풍경은 때때로 낯설고, 무겁고, 때로는 숨 막히게 느껴진다. 그러나 장생포문화창고의 북카페 창가에 앉아 그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 그것은 감동으로 변한다. 이제 우리는 이런 ‘울산다운 공간’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자랑스럽고, 매력적인 도시 울산을 만드는 길이다.
이규백 울산대학교 교수 울산공간디자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