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은 1962년 특정공업지구 지정 이후 대한민국 산업화의 핵심 동력이었다. 자동차·조선·석유화학으로 대표되는 중화학공업은 울산을 ‘산업수도’로 상징화했고, 그 위상은 오랜 기간 유지돼 왔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 산업 구조 재편, 인구 감소와 청년 유출이라는 구조적 변화 앞에서 울산 역시 근본적인 전환의 질문과 마주하고 있다. 기존의 성공 공식만으로 미래를 지속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대학에서 디지털콘텐츠를 가르치며 학생들을 만나는 현장에서 이 질문은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울산에서 제 전공을 살릴 수 있을까요?”라는 물음은 단순한 취업 고민을 넘어 지역 산업의 방향성을 묻는 신호다.
과거 울산은 하드웨어 중심의 산업 생태계가 절대적이었고, 콘텐츠와 소프트웨어는 부수적인 영역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산업 환경이 고도화된 지금, 이러한 구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흔히 디지털콘텐츠라 하면 게임이나 웹툰, 영상 등 엔터테인먼트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울산에서 디지털콘텐츠의 의미는 훨씬 넓고 깊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현장이 바로 디지털 기술과 콘텐츠가 결합되는 최전선이기 때문이다. 산업 메타버스와 디지털 트윈 기술은 이미 울산 제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 선박은 실제 건조에 앞서 가상 시뮬레이션으로 시운전을 거치고, 위험성이 높은 화학 공장 설비 점검은 가상현실(VR) 환경에서 이뤄진다. 자동차 공장의 복잡한 조립 공정 역시 증강현실(AR)을 통해 작업자에게 직관적으로 제공된다. 이 지점이 바로 울산이 서울이나 판교와 차별화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다. 수도권의 테크 기업들이 모니터 속 가상 공간에서 기술을 개발할 때, 울산은 그 기술을 즉각적으로 적용하고 검증해 볼 수 있는 거대한 ‘실증 단지(Test Bed)’를 보유하고 있다. 하드웨어라는 튼튼한 뼈대 위에 콘텐츠라는 신경망을 입힐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인 셈이다.
디지털콘텐츠는 산업 경쟁력에 그치지 않고 도시의 이미지와 기능을 확장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울산은 반구천의 암각화와 태화강이라는 세계적인 문화·자연 자산을 보유하고 있지만, 여전히 ‘보는 관광’에 머무르는 한계를 안고 있다. 소위 ‘노잼 도시’라는 오명은 볼거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즐길 ‘소프트웨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암각화 속 고래가 미디어아트로 재현되고, 증강현실을 통해 선사시대 생활을 체험하는 콘텐츠가 구현될 때 울산의 자산은 현재형 가치로 전환된다. 하드웨어 인프라에 스토리텔링과 디지털 기술이 결합될 때 울산은 산업도시를 넘어 머물고 싶은 체류형 문화 도시로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
무엇보다 디지털콘텐츠 산업은 청년 인구 유출을 완화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다. MZ세대는 안정성뿐 아니라 성장 가능성과 직무의 의미를 중시한다. 지역 주력 산업의 디지털 전환을 이끄는 콘텐츠 분야는 제조업의 연장선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영역이다. 대학이 산업 현장에서 요구하는 실감형 콘텐츠 인재를 양성하고, 이들이 다시 지역 기업의 혁신을 이끄는 선순환 구조는 울산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이를 위해 대학과 기업의 경계는 더욱 허물어져야 한다. 강의실에서 배운 그래픽 기술이 실제 공장의 안전 시뮬레이션으로 구현되는 과정을 학생들이 직접 경험하게 해야 한다. 기업 역시 지역 대학의 인재들을 단순 기능직이 아닌, DX(디지털 전환)를 주도할 핵심 파트너로 인식하고 과감한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이제 울산에 필요한 것은 인식의 전환과 전략적 선택이다. 제조업과 콘텐츠 산업을 분리해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동차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자율주행 시각화 기술, 선박의 스마트 운항 시스템 등 산업의 고부가가치는 이미 소프트웨어와 콘텐츠 산업에서 창출되고 있다. 울산시와 지역 산업계가 하드웨어 투자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 기술과 제작 인재에 과감히 투자할 때, 굴뚝 없는 공장은 기존의 굴뚝 산업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기반이 될 것이다. 제조와 콘텐츠가 공존하며 시너지를 창출하는 도시, 그것이 울산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선택해야 할 최선의 방향이다.
김지수 울산과학대학교 영상콘텐츠디자인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