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마태복음에는 이른바 ‘포도원 품삯의 비유’가 등장한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구하기 위해 이른 아침 장터로 나간다. 그는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일꾼들을 포도원으로 보낸다. 아홉 시, 정오, 오후 세 시, 그리고 해 질 무렵인 오후 다섯 시에도 다시 나가 일할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하루 일이 끝난 뒤, 주인은 가장 늦게 온 사람들부터 품삯을 지급하는데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은 더 많은 품삯을 기대하지만, 그들 역시 한 데나리온을 받는다. 불공평하다는 항의에 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대들과 약속한 품삯을 주지 않았소?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쓰는 것이 어찌 잘못이오?”
이 비유는 신학적으로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품삯은 노동 시간의 길고 짧음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인의 은혜와 선택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은혜의 질서 안에서는 공로의 계산이 무의미해지고, 한 나절의 노동과 두 나절의 노동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사라진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현실 세계의 노동시장으로 옮겨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우리의 법 감정과 사회적 정의관은 더 오래 일한 사람이 더 많은 보상을 받는 것이 옳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포도원 주인의 보상 방식은 신학적 논리로는 설명될 수 있을지 몰라도, 사회적 상식으로는 수긍하기 어렵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보자. 만약 일찍 온 사람보다 늦게 온 사람에게 오히려 더 많은 품삯이 지급된다면 어떨까. 보상체계에 대한 신뢰는 더욱 흔들릴 것이다. 이제 ‘두 걸음 더’ 나가 보자. 오전부터 일한 사람에게는 전혀 품삯을 주지 않고 오후부터 일한 사람에게만 품삯을 준다면, 이는 상식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난 상황이 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두 걸음 더’ 나간 방식과 유사한 정책이 2026년 대한민국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새해부터 면역항암제 ‘키트루다’의 건강보험 급여 대상을 소장암과 위암을 포함한 9개 암종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흑색종 등 4개 암종에 한정되어 있던 기존 급여 범위를 넓힌 것은 분명 환영할 만한 결정이다. 문제는 급여 확대와 함께 설정된 세부기준이다. 즉, 투약 시작 후 2년 이내의 환자에게만 급여를 적용하겠다는 기준이다.
이 기준이 적용되면, 이미 수년간 자비로 치료를 받아오며 치료 효과를 입증해 온 장기 투약 환자들은 급여 혜택에서 완전히 배제된다. 키트루다는 T세포가 암세포를 인식하고 파괴하도록 돕는 면역관문억제제다. 1회 투약에 약 300만원이 드는 고가 항암제다. 고가 치료로 인한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것만으로도, 급여 확대는 목마름으로 타죽어가던 환자와 가족에게 신기루처럼 나타난 오아시스의 약속이다. 새로 투약을 시작한 환자, 즉 오후에 포도원에 들어온 일꾼은 오아시스에서 목을 축인다. 그러나 7~8년 이상 치료를 이어온 환자, 즉 아침부터 일해 온 일꾼은 신기루 속에 희망고문의 결정타로 다시 쓰러진다. 비상식적인 역차별의 세부기준이 이들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지는 것이다.
왜 7~8년 이상 혹은 25개월간 투약한 환자는 제외되고, 23개월간 투약한 환자는 급여 대상이 되는지에 대해 명확한 설명은 제시된 바가 없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장기 투약 환자들을, 이렇게 정책이 보호망 바깥으로 내던질 수는 없다. 보건복지부는 이 세부기준을 시급히 재검토하고,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내놓아야 한다.
이와 같은 정책의 부조화는 키트루다 하나의 문제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재정 추계에만 매몰된 탁상공론, 현장의 다양성을 반영하지 못한 획일적 기준, 충분한 설명 없이 그어진 선은 정책의 정당성과 사회적 수용성을 동시에 약화시킨다.
포도원 주인이 지급한 품삯은 그의 사유재산에서 나왔다. 주인은 자신의 재산을 어떻게 품삯으로 지급할지 결정할 자유를 가진다. 그러나 건강보험 급여는 전혀 다르다. 재원은 정부의 사유재산이 아니라 국민이 오랜 기간 납부해 온 보험료와 세금이며, 급여는 시혜가 아니라 사회적 계약의 이행이다. 따라서 급여 기준은 일방적 처분의 영역이 아니라, 정당성과 형평성에 대해 끊임없이 설명되고 검증되어야 할 공적 기준이다.
이명훈 고려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