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한 시대의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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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한 시대의 마감
  • 경상일보
  • 승인 2021.12.3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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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때로 한 시대는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어떤 소소한 사건과 함께 막을 내리기도 한다. 마치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 소박한 자취방에서 작은 틈으로 드나드는 생쥐에게 먹다 남은 작은 치즈 조각을 건네는 어떤 젊은이의 손끝에서 시작되듯이. 남의 나라 얘기고 전설처럼 전해져 실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시대가 그렇게 시작되었다고는 이야기할 만한 그런 스토리텔링이다.

울산의 등록 1호 박물관인 울산대학교박물관이 곧 문을 닫는단다. 2년여 이런저런 행정적 절차도 마무리되었고, 힘들게 이 일을 맡아 주섬주섬 정리하던 이도 며칠 뒤, 연구실 문 잠그고 떠나면, 한 세대 가까이 계속되었던 울산유적의 고고학적 발굴과 새로운 유형의 청동기시대 주거지 발견 소식,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학예연구 인력 양성 등이 기억의 저편으로 건네질 과거의 일이 된다. 30년을 한 칸 못 채우고 폐쇄되는 어떤 대학박물관 이야기이기도 하고, 문화콘텐츠와 스토리텔링, 에코-그린, 디지털 메타버스의 새로운 중심을 말하고 꿈꾸는 대한민국 근대화, 산업화의 메카에서 일어나는, 극히 어색하고 낯선 사건이기도 하다.

정책적으로 모든 상황이 정리된 지 6개월도 더 지난 시점에, 개인적으로 꼭 필요했던 1년 동안의 연구년이 끝난 뒤에야 소식을 전해 들었다. 대학박물관이 문 닫는다! 어찌, 이런 일이. 살다 보면 별일을 다 겪게 되지만, 이제야말로 박물관의 존재 가치와 의미가 더욱 확실해지는 시점에 이런 일이? 서울에서는 100개의 박물관, 미술관 설립이 현실이 되어간다는 이때, 학예사 100명을 추가로 뽑는다는 소식이 새 직장에서 일할 기회 얻기를 기다리던 젊은이들 가슴을 설레게 하는 시점에, 이곳 울산에서는 1호 박물관을 닫는 일이 일어나는구나!

30년 지방자치의 경험 속에 강조되는, 절실히 느끼며 공감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지방사회가 필요로 하는 각 분야 전문 인력은 일부라도 자체적으로 양성하여 필요로 하는 자리에 배치하는 게 좋다는 사실이다. 지역사회에서 자라며 전문지식과 능력까지 갖추어 어느 정도까지는 정말 시급히 해야 하는 일을 알고 이해관계나 마찰을 겪지 않고 잘 마무리할 수 있는 이가 있어야 한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고 할까.

울산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의 산업화, 근대화는 울산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고만고만한 영남의 작은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던 울산. 여기에 모여든 산업의 역군들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몇 나라 가운데 하나였던 대한민국을 OECD 선진국 모임의 일원으로 만들고, 근현대의 후진국 가운데 유일하게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 원조받다 원조하는 나라가 되는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런 울산의 다음 목표가 문화콘텐츠, 에코-그린, 디지털 메타버스 세상을 열고, 끌어나가는 인력을 양성하여 대한민국과 세계 곳곳의 에코산업 및 콘텐츠산업, IT산업의 현장으로 보내는 일이다.

이 일을 누가, 어디서 할 것인가. 지역의 유일한 종합대학이자 전문인력 양성기관에서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어디서 이런 인력을 훈련, 양성해 필요로 하는 산업 현장으로 보낼 것인가. 새로운 유형의 제조업인 에코-그린 산업과 IT, 3D 문화콘텐츠 디자인과 앱 개발, 스토리텔링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전적으로 전국 곳곳, 세계의 이곳, 저곳에서 수입해야 한다면, 광역자치단체로서의 울산은 공간과 재화만 공급하는 21세기 신산업의 하청기지로 전락하는 것 아닌가. OECD 대한민국을 만든 산업수도 울산의 역사는 과거의 영광으로만 남아야 하는가?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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