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화앵(花鶯)에 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과 경주 지역 읍지인 <동경통지>(1933)에 전한다. 고려 명종 때의 문인 김극기(金克己)의 한시 <조전화행(弔花鶯)>도 전화앵을 이야기할 때 자주 언급된다. ‘동도(東都)의 명기(名妓)’라는 기록으로 보아 전화앵은 경주 지역에서 당대에 꽤 이름 있는 기생이었던 것 같다. 비록 울주군 두서면 활천리의 무덤이 2008년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의 발굴 조사에 의해 진묘(眞墓)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조의 ‘열박령은 경주 남쪽 30리에 있고, 동도의 기녀 전화앵이 묻힌 곳’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전화앵의 무덤이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 어딘가에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동안 울산은 추모제를 지내고 묘역정비사업을 실행하는 등 전화앵을 울산 기생으로 기리는 사업을 전개했었다. 사실, 전화앵을 울산 기생으로 볼 근거는 없다. 그의 무덤이 있다는 두서면은 과거에 경주 지역이었다. 그에 관한 행적들은 근거 없이 부풀려진 면이 없지 않다. 따라서 전화앵을 울산 기생으로 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다만, 예술 작품으로서의 전화앵은 충분히 가능하다. 예술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미적 작품 창조활동이기 때문이다. 전화앵이 비록 울산 기생이 아닐지라도 울산의 예술인들이 전화앵을 예인으로 보고 그를 바탕으로 한 예술 활동을 하는 것은 좋은 시도이다. 이 점에서 최근 울산의 무용 단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전화앵에 관한 무용이나 무용극 등의 공연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자란(紫蘭)은 실재했던 울산 기생이다. 그에 관한 기록은 박민효의 <상체헌유집>에 전한다. 일찍이 이수봉 교수가 학계에 소개했으며(논문집, 영남대 병설 공전, 1971), 이후 조희웅 교수에 의해 <한국 고전소설사 큰사전 47>(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7)에 울산 지역의 고전소설 작품으로 수록되었다. 최근에 필자가 자란에 관한 종합적 고찰(울산남구향토사연구 제11집, 2018)을 시도한 바 있으며. 최흥기 울산 남구문화원 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이 자란에 관한 필자의 연구를 바탕으로 울산 병영의 교방 문화를 연구 발표하였다(한국예술연구 제34호, 2021).
<상체헌유집>에 전하는 자란 이야기는 ①자란의 어린 시절과 병영 교방에서의 생활(가무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자란), ②병영 우후(뒤에 울산 부사 겸직) 윤면과의 만남과 사랑, ③1년만에 윤면이 병환으로 죽고 조석으로 빈소를 지키며 애통해하는 자란, ④자란의 부모를 겁박하여 자란으로 하여금 수청들게 하는 신임부사 정광운, ⑤수청 들기를 거부하고 18세의 어린 나이에 굶어 죽은 자란, ⑥자란을 염습하여 선산에 부장한 윤면의 적자, ⑦열기(妓) 자란을 칭송하는 세상 사람들로 간략히 정리할 수 있다.
자란의 삶은 현전하는 그 어떤 고전소설 작품에서도 볼 수 없는 비극성을 지니고 있다. 흔히 춘향전과 비교하기도 하지만, 실제 이야기라는 점과 비극성의 측면에서는 <춘향전>을 능가한다. 울산에서 태어나고 울산에서 살다가 울산에서 죽은 자란은 그 누구보다도 울산을 대표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삶이 지니는 서사성과 비극성은 무궁한 콘텐츠화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문화도시 울산으로 발돋움하는 이 시점에서 울산 기생 자란의 존재는 울산의 문화인이라면 눈여겨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그동안 자란에 관한 콘텐츠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란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콘텐츠화의 가능성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
울산은 대외적으로 여전히 산업도시로 알려 있지만, 사실 울산은 역사와 문화의 도시이다.
울산은 구석기시대~청동기시대에 이르는 원시문화, 가야·신라의 고대문화, 고려·조선의 중세문화가 오롯이 살아 있다. 내륙문화와 해양문화, 산업화로 인한 이주문화, 동학과 천주교의 유적들, 빨치산의 아픈 기억들이 모두 공존하고 있는 도시가 울산이다. 그런 만큼 울산을 드러낼 만한 인물과 문화 유적은 많다. 다만 우리가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거나 새로운 것을 찾아 드러내지 못할 뿐이다.
송철호 울산남구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