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곤의 살며생각하며(31)]한 줄의 지혜가 주는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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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곤의 살며생각하며(31)]한 줄의 지혜가 주는 위로
  • 경상일보
  • 승인 2022.08.03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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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곤 칼럼니스트·철학박사

인간의 삶은 권리이기 보다는 의무에 가깝다. 자기 앞에 주어진 시간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견디고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 모든 인간의 숙명이다. 그래서 비록 탕약처럼 쓴 시간 속에서도 그것을 헤쳐 나가는데 필요한 작은 위안이나마 찾으려고 애를 쓴다. 감당하기 힘든 삶을 견디는데 도움이 되는 주문 같은 것을 누구나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이유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힘든 시간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사용해본 적이 있는 정신적인 상비약이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솔로몬의 지혜가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서 아직도 우리의 고통을 위로하는 진통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인간의 삶과 시간의 관계를 이보다 더 명확하게 간파하는 언어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행복과 피할 수 없는 불행에 대한 지혜도 깊은 철학적 이론보다는 간명한 예술적 통찰을 통해서 얻는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게 행복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까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소설에서 보여주지만 결국 작가가 하고 싶었던 삶에 대한 통찰은 이 한 문장에 모두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현대 심리학자들이 발견한 가장 행복한 순간은 단순하다. 편안한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시간이라는 것이 동서양을 막론하는 공통적인 의견이다. 멀리 있는 가족들이 한데 모여 은은한 조명 아래서 칠면조 요리를 먹는 미국의 추수감사절 모습이 지금도 행복한 가정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까닭이다. 그러나 불행은 너무나 다양한 모습들을 띠고 있어서 톨스토이 같은 대 문호도 그것을 몇 마디의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웠으리라 생각한다. 안나까레니나의 불행이 소설 2권을 통해서 표현되는 까닭이다. 인간의 행복을 그리는데 책 2권 분량이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행복과 불행의 거리는 너무 가까워서 참혹한 불행이 가장 행복한 순간에 찾아오기도 한다. 며칠 전 전북 무주의 한 다리 밑에서 소풍을 하던 가족 4명 중에서 3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단순히 사고라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웅덩이에 빠진 10대 아들을 구하러 간 아버지와 아버지를 구하러 간 20대 아들이 모두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 광경을 지켜 본 어머니는 말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경찰이 묻는 말에 아무 말도 대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불행이나 고통이라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상황도 우리의 삶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이가 들면 남은 시간을 지탱하는 지혜도 조금씩 변해가는 것 같다. 정신보다는 육체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고통이나 불행의 성격도 정신에서 오는 것보다는 육체의 변화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시인 이성복은 우리가 힘들어 하는 정신적 고통에 대해서 단호하게 말한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요즈음 자주 떠올리는 말이다. 그리고 오래된 그의 산문집을 다시 꺼내어 읽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 병을 신경성으로 추단한 의사는 정신과에 추천서를 내주었다. 나는 그것을 찢어버렸다. 내 육체가 정신에게 병을 건네주었다면 용서할 수 있으나 정신이 육체의 정상적인 움직임을 방해했다면 수치스러운 일이다.’ 시인의 결기가 느껴지는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신은 행복을 만드는 것보다는 고통을 만들어내는 것에 더 신속하고 전문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사회적인 삶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는 은퇴 이후의 시간은 이러한 부정적 흐름을 가속화 한다. 노년의 삶을 지탱하는 경제적 안전판, 건강, 그리고 가족들의 진심어린 격려 같은 것들이 말처럼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기를 무사히 건너가는 지혜가 담긴 말을 찾아야 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정신과의사 빅터 프랭클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수용소에서 발견했다고 쓰고 있다. 삶과 죽음이 순간에 엇갈리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수감자들은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에 ‘예’라고 말하려 하네.”

김상곤 칼럼니스트·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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