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혜숙의 한국100탑(73)]밀양 소태리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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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혜숙의 한국100탑(73)]밀양 소태리 오층석탑
  • 경상일보
  • 승인 2022.08.26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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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혜숙 수필가

한 시절을 붉게 태우던 꽃이 바닥에 낭자하다. 때를 잘못 짚어 왔다. 어디 이번뿐인가. 꽃피는 시기만 놓친 것이 아니라 달뜨는 시각도 눈 내리는 시기도 맞추지 못해 헛걸음을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잠시 피었다 지는 봄꽃과 달리 백일홍은 여름내 번갈아 피고 지는 것을 반복하기에 느긋했다. 그 백일을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소태리 오층석탑이 빛을 발하는 것은 주변의 짙붉은 배롱나무 꽃이 만개하는 시기다. 십여 그루의 나무가 장엄한 단청을 입힌 전각이 되어 탑을 지긋이 감싸 안는다. 그런데 꽃이 분분히 지고 있으니 탑도 힘을 잃고 뉘엿거린다. 후드득 후드득 굵은 소나기까지 내린다.

다음을 기약하고 막 돌아서려는데 빗물에 젖은 앙증스런 연꽃이 ‘그냥 가려고요?’ 붙잡는다. 어라, 오층석탑의 지붕돌 네 귀퉁이마다 연꽃이 피었다. 꽃의 중앙에는 방울장식을 달았던 구멍이 큼직하다. 물방울이 맺혔다 또르르 흘러내린다. 은연한 풍경소리다.

화강암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고려의 장인은 든든하게 기단을 놓고 보배롭게 오층의 탑신을 한 층 한 층 쌓아 올린다. 그리고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상륜부를 장식한 후, 마지막으로 허공의 연못에 저렇게 찬찬하고 세밀하게 꽃송이들을 피워낸다. 심심상인, 말없이 마음으로 부처님께 뜻을 전한 것이다. 소태리 석탑이 다른 탑과 구별되는 것은 배롱나무 꽃이 아니라 진리를 보여주는 돋을새김한 연꽃이라고 일러준다.

밀양 소태리 오층석탑은 보물 제312호다. 1919년, 탑 상륜부에서 고려 예종 4년(1109)에 백지에 먹으로 쓴 <당탑조성기>가 발견되어 건립연대를 알 수 있다. 존재 증명이 분명한 귀중한 탑을 만나는 일이 반드시 때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시절인연이 도래하지 않아 기회를 놓친들 어떠한가. 부처님께서야 몽매한 중생을 제도하는 대원을 항시 품고 있으니 처처가 도량이다. 마음이 바로 절간이고 탑이다.

잠시 그쳤던 소나기가 다시 기운차게 쏟아진다. 석탑의 어깨 위로 꽃비가 내린다.

배혜숙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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