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곤의 살며생각하며(32)]휴양림 평상에서의 여름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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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곤의 살며생각하며(32)]휴양림 평상에서의 여름살이
  • 경상일보
  • 승인 2022.09.07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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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곤 칼럼니스트·철학박사

올해 한여름을 한라산 자락에서 보냈다.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자연 휴양림에는 인근 주민들이 한낮의 폭염을 피해 모여든다. 특히 편백림이 무성한 정상 주변은 여름 하루를 시원하게 보낼 장소로는 그만이다. 그러다보니 이곳에 놓여 있는 평상을 차지하는 일이 쉽지 않다. 경관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아침부터 서두르는 수밖에 없다.

혼자 몸을 움직이는 일은 어렵지 않으나 하루 종일 산속에서 지내자면 허기를 때울 준비가 있어야 한다. 하루의 시간을 채울 책을 준비하는 것 못지않게 허기를 맞이하는 준비도 외진 산속에서는 절실한 일이다. 이럴 때 맛이나 영양분 같은 것은 고려의 요소가 되지 못한다. 허기를 가장 간단하게 넘기는 방법을 고민하다보면 저마다의 요령을 얻게 된다. 나는 이것을 ‘위장을 달래는 방법’이라 스스로 명명했다. 나이가 들어 미각에 대한 욕구가 무디어지면서 어떤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술을 제외하고는 그리 간절하지 않다. 그래도 때마다 찾아오는 허기는 그리 박절하게 대할 수만은 없는 손님 같은 것이다.

평상 하나를 차지하고 그 위에 등산의자와 책들을 펼쳐 놓으면 보기만 해도 하루가 풍성해진다. 25℃를 넘나드는 시원한 온도도 그렇지만 아름드리 편백림 아래에서 느끼는 공기의 청량함은 어디에서나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하루의 할 일이 정해져 있고 소속된 공간이 있는 젊은 날에는 더위를 피해 이곳저곳에 모여 있는 나이 든 사람들을 보면서 그리 편안한 시선을 가질 수가 없었다. 특히 다리 밑에 모여 있는 노인들의 모습은 어쩐지 처량한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경로당이나 커피숍에라도 들어가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지극히 편의적이고 물정 모르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여기에 와서도 더위를 피하려고 바닷가 카페 여러 곳을 찾아가 보았다. 그러나 혼자서 보내는 시간은 길어야 두 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강한 에어컨 바람에 의존하는 공간이 노인 친화적인 장소도 아니거니와 그곳은 누군가의 바쁜 일터라는 생각이 들어 하릴 없이 오래 앉아 있는 일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같은 장소에서 며칠을 지내다 보면 이웃 아닌 이웃을 만들기도 한다. 평상을 얻지 못한 중년의 아주머니들은 스스럼없이 평상을 같이 쓰자고 요청한다. 주변에서 지내다 보니 매일 혼자서 평상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서 책을 읽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 터이니 평상 한쪽을 양보하라고 한다. 휴양림 입장료 1000원을 같이 내는 마당에 평상의 독점권을 굳이 주장하지도 못한다. 또 그다지 불편하지도 않다. 나는 앉아서 책을 보고 아주머니는 누워서 휴대폰을 보거나 잔다.

휴양림의 하루를 채우기 위해서는 정신을 한 곳으로 모으는 책읽기만으로는 부족하다. 해가 약간 기울어지고 눈이 피로해 지면 숲길을 걷는다. 우거진 숲속을 걷는 일은 몸이 숲을 깊게 받아들이는 느낌을 주고 책속에서 얻는 기쁨과는 또 다른 정서를 경험하게 한다. 한 시간 남짓한 산보가 끝나고 나면 하루 일을 마친 농부처럼 이젠 집으로 돌아가도 좋을 것 같다는 충만감을 맛보게 된다. 허기를 면하는 소박한 식사와 청량한 공기, 가벼운 독서와 숲길 걷기가 주는 만족감은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그의 수필 <월든>에서 전하고 싶었던 느낌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집으로 가고 싶다는 느낌을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는 모든 것이 가볍게 느껴진다. 도회의 거리에서는 좀처럼 얻기 어려운 소중한 정서이다. 편안한 수면은 덤으로 온다.

올해의 여름은 숲속의 평상 하나로 누구도 부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평상 하나가 여름 별장이었다. 앞으로 갈수록 여름 더위는 극성을 부릴 것이 명확하다. 서귀포자연휴양림의 평상 하나가 주는 여름살이의 즐거움을 울산에서도 경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여름에 편히 찾아갈 공간이 어디엔가 있지 않겠는가.

김상곤 칼럼니스트·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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