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을 땐 도서관으로 간다. 크고 작은 어느 도서관에도 한두 종류의 세계문학전집은 있기 때문이다. 이 책들 속에는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항상 기다리고 있다. 천재나 대가들이 창조한 그들은 시대를 뛰어넘는 지혜와 남다른 개성을 가진 인물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약속이 없이도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작은 행운이 아니다. 또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어려운 여건 속에서 힘든 삶을 살아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절실하고 감동스럽다. 그리고 대화의 장소나 방법도 참 편안해서 좋다. 번잡한 식당이나 커피숍에서의 대화도 더러는 필요하지만, 나이가 들면 조용하고 쾌적한 도서관에서 침묵으로 이루어지는 대화가 더 편안하고 진솔하다. 현실적인 대화에서는 토로하기 힘든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에 대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남아있는 시간의 의미에 대한 정직한 시각을 얻는 것도 여기에서다.
또 이들과의 대화는 심신이 모두 편안할 때 시작할 수 있고 조금이라도 힘들거나 피로하면 언제라도 멈출 수 있어 좋다.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 하는 대화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공감하기 어려운 주장이나 지극히 개인적인 넋두리도 끝까지 들어 주는 것이 인간적인 태도이고 술자리의 미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대화의 공감도를 높이기 위해 막걸리 잔을 빠르게 비워내는 일은 쉽지도 않거니와 어울리지도 않는 일이다. 꼰대가 되어간다고 나무래도 어쩔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도서관 대화를 좋아하게 된 중요한 동기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요즈음은 새로운 친구를 만나기보다는 젊은 시절에 한두 번 만났으나 기억이 희미해진 친구들을 다시 만나는 것이 즐겁다. 최근에 다시 만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와의 대화는 이틀에 불과했지만, 그는 우리가 누리는 일상적인 삶의 소중함을 단 하루의 생활 속에서 호소력 있게 보여주었다. 앞서간 사람들이 꿈꾸기 어려운 행운들은 우리는 지금 얼마나 많이 누리고 있는가. 항상 배불리 먹을 수 있고,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어디든지 갈 수가 있다. 여기에 더하여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편안한 잠자리가 항상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이반 데니소비치는 자신의 수용소 생활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가 바라는 하루의 행복은 너무나 소박하여 슬픔에 가깝다.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몸을 녹일 곳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있는 ‘사회주의 생활단지’로 작업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점심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잎담배도 사지 않았는가.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러시아 작가 솔제니친이 실제로 겪은 수용소 이야기라고 한다.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는 돼지비계 한 도막도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
도서관 친구들과의 대화는 남은 생애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자면 눈을 아껴야 한다. 책 속의 대화로 눈이 피로해지면 멀리 보는 곳으로 간다. 가을에는 어느 산을 올라도 멀리 볼 수 있다. 제주의 가을 바다는 어느 높이에서도 뚜렷이 보인다. 뒷동산 같은 오름에 올라도 제주의 바다를 가까이 볼 수 있다. 서너 시간이 거리의 한라산 탐방로에서는 섬의 절반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너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을 산과 바다의 시원한 풍경으로 채우는데 필요한 것은 버스비와 물 한통 그리고 주먹밥 한 덩이면 족하다. 이 또한 작은 행운이 아니다. 도서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얻는 기쁨이나 가을 산행이 주는 편안함은 이 계절에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선물이다.
김상곤 칼럼니스트·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