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곤의 살며생각하며(34)]위기에 필요한 민족적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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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곤의 살며생각하며(34)]위기에 필요한 민족적 지혜
  • 경상일보
  • 승인 2022.11.02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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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곤 칼럼니스트·철학박사

우리는 세계의 인종들을 민족이라는 기준으로 구분하고 자기가 속한 민족공동체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한 민족의 정체성을 정의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학자들은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라고 한다. 그럼에도 모든 민족은 자신들 고유의 특성인 민족성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는다. 특히 세계 역사에 짙은 그림자를 남긴 민족들은 자신들만의 민족성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에서 얼마간이라도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철학적 사유와 음악 감상을 삶의 기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어떻게 히틀러와 같은 인간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선택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야수와 같은 히틀러의 광기에 동참하며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일어난 일시적인 최면상태라고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범죄를 온 국민들이 함께 저지른 것이다.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고자 오랫동안 고심한 독일인도 있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토마스만은 자기 민족의 집단적인 광기를 직접 목격하면서 평생을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예순 여덟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3년 동안 한 작품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미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노작가를 긴 시간 동안 고심하게 한 주제는 자기 민족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학문과 예술을 숭상해 온 문명국가 독일에서 어떻게 히틀러 정권과 같은 극단적인 야만 세력이 등장할 수 있었는가. 문화민족이라고 자부하는 독일이 어떻게 두 차례나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반인간적인 일들을 자행할 수 있었는가. 토마스 만은 조국 독일의 정신적 전통과 독일인의 정체성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조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가 가장 애착을 느낀다고 고백한 소설 <파우스트 박사>이다.

토마스만이 던진 의문은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서로 미사일을 쏘아대는 것을 우리는 뉴스화면이나 휴대폰에서 매일 보고 지낸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벌이는 살육행위의 원인이 무엇인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똑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20세기 문학과 철학의 지형도를 바꿔놓았다는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배출한 민족이 어떻게 푸틴과 같은 대책 없는 전쟁광을 그들의 지도자로 뽑았을까. 어디 문학뿐인가. 차이코프스키 같은 천재 음악가들을 수도 없이 배출한 민족이지 않은가. 그들도 문학과 음악을 생활의 기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적이 있어 더욱 혼란스럽다.

10여년 전에 울산의 우호도시 시베리아 톰스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멀리서 온 손님들에게 작은 실내악단의 연주를 들려주었다. 그들은 전문 연주자들이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이 연주하는 첼로나 바이올린은 대부분 오래되어 색칠이 벗겨진 낡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연주 수준은 어느 실내악 연주 못지않았다. 세계문학과 예술을 이끌어 가는 민족이 푸틴을 숭배하고 지지하며 수많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전쟁을 계속하도록 부추기고 있다고 한다. 눈 내리는 시베리아 겨울밤에 들은 음악 소리와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은 광기를 그들의 민족성이라고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러시아 대통령이나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누가 되어도 나의 일상생활과는 그다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노라면 이런 소박한 믿음이 얼마나 안일하고 위험한 것인가를 절감하게 된다. 이웃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영구집권이라는 구시대적 욕심을 구체화하면서 대만과의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다. 민족을 통일한다는 명분이라고 한다. 중국이 인종적으로 하나의 민족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이웃 중국의 전쟁이 러시아가 벌이는 전쟁과 같은 ‘강건너 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한 일이다. 대륙변방의 작은 나라를 세계 경제 대국으로 만들었고, 세계 대중문화를 이끌어 가는 우리 한민족이 다시 한 번 민족 최고의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우리가 뽑은 정치 지도자의 판단과 행동이 이 큰 파고를 헤쳐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상곤 칼럼니스트·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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