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협상은 아무나 하나
상태바
[경상시론]협상은 아무나 하나
  • 경상일보
  • 승인 2022.11.03 0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준희 미국변호사

우리나라 법과대학에는 없고 미국 로스쿨에는 있는 특이한 과목이 하나 있다. 바로 협상론이다. 과거 인기를 끌었던 미국 법정 영화나 드라마 덕분에 우리에게도 제법 익숙한 배심 재판에서 배심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이 직업상 소양으로 요구되는 탓에 로스쿨에서 배우의 연기법을 가르친다고도 들었는데, 이건 사실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협상론을 가르치는 건 사실이었고, 나는 오랜 호기심을 해소하려는 마음에 미국 조지타운 로스쿨 유학 첫 학기에 2학점짜리 협상학 과목을 수강했다.

협상을 배운다고 잘 할수 있을까? 이 질문은 실무에서 크고 작은 협상 자리에 앉았던 내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질문이었다.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라든가, 상대방의 제안을 경청하라든가, 대안(BATNA)을 가지고 협상 장소에 가 있어야 한다든가 하는, 협상학에서 배우는 많은 전략들과 이론들은 그 자체로서 다 맞는 말들이지만 막상 실제 상대방을 마주한 자리에서는 생각대로 구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값을 깎으려는 자와 올려 받으려는 자, 합작법인의 운영에 전권을 가지려는 자와 이를 견제하려는 자, 매각자산에 내재한 위험을 떼어내고 싶어하는 자와 매수 이후 자산에 수반된 위험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자 사이에는 애초에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무슨 수로 스톡 포토(stock photo) 속 이미지처럼 서로 웃으며 이야기를 주고받다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악수를 하고 헤어질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의문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탓에 매번 난이도가 올라가는 협상 업무는 단연 스트레스가 높다. 최근 맡았던 민사 조정사건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정(mediation)이란 분쟁 당사자 간 합의에 의해 선임된 조정인의 입회하에 양 당사자가 모여 대립하는 쟁점을 해소하고 합의(settlement agreement)에 이르는 소송 대체적 분쟁해결 방법(ADR)이다. 미국은 소송 천국이라 불리지만 재판 외적인 방법으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제도를 도입하고 발전시키는 데도 적극적인데, 조정도 그 중 하나이다. 이를 위해 많은 민간기구들이 설립되어 있으며, 판사 출신의 변호사들을 포함해 여러 산업분야에서 전문 경력을 갖춘 다수의 조정인들이 의뢰 받은 사건을 신속하고 경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협의에서 시작해 합의로 끝나는 조정의 속성상, 신경전은 조정인을 선임하는 때부터 시작된다. 불편부당한 자로서 개별 사안의 쟁점에 대한 높은 이해와 분쟁의 종국적 해결을 합의서 안에 담을 수 있는 식견과 경험을 갖춘 인물은 찾기도 어렵고 적임자인지 확인하기 위한 검증은 더 어렵다. 조정인 선임과 조정 일정, 참석자 명단을 정한 합의서(mediation agreement)를 체결하면 일단 준비는 끝난 셈이다. 본격적인 조정은 특정 일자를 정해서 진행되는데, 전일 일정으로 진행될 수도 있고, 오전이나 오후 시간만으로 끝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는 조정인 사무실 등 정해진 장소에 모두 모여 진행하나, 최근과 같이 밀집한 모임이 제한되는 경우 인터넷을 통한 원격 화상 참여 방식도 가능하다.

절차별로 상세히 법제화되어 있는 소송과 달리, 조정의 진행은 조정인의 재량 하에 이루어진다. 쟁점의 당부(當否)에 대한 다툼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으나, 민사 조정은 대개 손해배상을 위한 금액 합의로써 종결되므로 구체적인 숫자가 담긴 제안은 제시되어야 한다. 금액은 특정될 수도 있고(hard number), 범위를 정해 제시될 수도 있다(bracket number). 최초 제안으로 시작해 무수한 수정 제안을 주고받다가, 양측이 제시한 상한선과 하한선이 겹치는 때 마침내 합의가 이루어진다. 협상을 통해 이견을 좁혀 나가 합의에 이르러 분쟁이 종결된다는 ADR의 공식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랄까. 많은 기대와 며칠의 밤샘 준비에도 불구하고 이번 조정은 성사에 이르지 못했다. 합의 도달을 위한 출발점이 처음부터 너무 멀었던 탓이다. 나를 믿고 의뢰해준 사건에 비용과 시간을 들여 일했는데 이번처럼 조정이 결렬되면 괴롭다. 역시 협상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이준희 미국변호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
  • 대형 개발로 울산 해양관광 재도약 모색
  • [기자수첩]폭염 속 무너지는 질서…여름철 도시의 민낯
  • 신입공채 돌연 중단…투자 외 지출 줄이고…생산직 권고사직…허리띠 졸라매는 울산 석유화학업계
  • 아마존·SK, 7조규모 AI데이터센터 울산에
  • 울산, 75세이상 버스 무료 교통카드 발급 순항
  • 방어진항 쓰레기로 ‘몸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