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시각]음악에도 ‘TPO’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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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의 시각]음악에도 ‘TPO’가 있다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3.03.13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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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상헌 문화부 차장

과전불납리 이하부정관(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 ‘오이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아래에서는 갓도 고쳐 쓰지 말라’. 아무 관계도 없이 한 일이 공교롭게도 때가 같아 억울하게 의심받거나 난처한 상황에 부닥칠 수 있기에 조심하라는 의미로 쓰인다.

지난 2월24일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년이 되던 날이었다. 세상에 좋은 전쟁 없고 전쟁에서 승리자도 있을 수 없다. 피해는 고스란히 해당국 국민이 받는다. 지난 1년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민간인 사상자는 2만명을 넘겼다. 국민의 3분의 1은 피난민이 됐다. 러시아 역시 피해를 보았다. 군 사상자가 우크라이나가 10만명이지만, 러시아는 20만명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다. 참혹한 현실이다. 전쟁 발발 1주년에 평화를 바라는 애도의 음악이 흘러도 이상한 것이 없는 날이다.

하지만, 울산에서는 화려하고 폭발적인 관현악법과 극적이고 박진감 넘치는 음악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차이콥스키의 ‘Marche Slave, Op.31’(슬라브 행진곡 작품 31)이 울렸다. 이 곡의 막바지에는 트롬본과 튜바가 러시아 국가인 ‘신께서 차르를 구원하신다’ 선율을 강하게 부각한다. 차이콥스키가 러시아의 민족의식을 자극하기 위해 만든 곡이기 때문이다.

울산시립교향악단은 이와 관련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1주년 시점과 곡목 선정과 관련한 입장’이라는 자료를 발표했다. 자료에서 러시아 출신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 니콜라이 알렉세예프는 지난해 당초예산 편성 시기에 올해 연주회에 들어가는 8개 (메인) 곡목을 전달했고, 연주회 기획담당자가 공연장 대관과 협연자와의 일정 조율 등에 따라 ‘Marche Slave, Op.31’ 등 소품곡을 편성해 전쟁 발발 1주년이나 예술감독과는 상관이 없다고 했다.

러시아 출신 지휘자가 러시아 작곡가의 곡을 지휘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곡 선정도 단순 해프닝으로 그칠 수 있었지만, 입장문을 보면서 의구심이 커졌다. 협연자는 같은 작곡가의 ‘Variations on a Rococo Theme Op.33’(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를 연주했다. 같은 작곡가의 곡을 선택해야 했다면, 전쟁 발발 1주년에 우크라이나 민요로 그들의 정서를 담은 일명 ‘소러시아’라는 별명이 붙은 차이콥스키의 ‘Symphony No.2 in C Minor, Op.17’(교향곡)도 있다. 수만명이 죽어 나가는 전쟁이 끝나지 않은 것을 감안한다면, 소품곡을 선정할 충분한 이유와 시간적 여유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음악에도 시간(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 ‘TPO’가 있다. 어떤 경우라도 울산의 대표하는 울산시립교향악단의 대외 이미지가 중요하다. 울산시립교향악단의 연주회, 특히 정기연주회는 개인 발표회가 아니다. 공식행사에서 울산시를 대표하는 악단의 연주다. 3·1절 기념식에서 기미가요를 연주한다고 상상해 보라. 메인 곡이 아닌 소품곡이라도 신중히 선정해야 한다.

전상헌 문화부 차장 honey@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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