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눈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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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시론]눈부처
  • 경상일보
  • 승인 2023.03.2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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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치호 마인드닥터의원 원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첫눈이 펑펑 오는 날, 그는 얼마 전 태어난 자신의 첫아기가 떠 올랐다. 세상의 첫눈을 보게 해주고 싶어서 조퇴하고 집으로 달려갔다. 곤히 잠든 아기를 안고 마당으로 나갔고 하얀 눈은 아기의 하얀 볼에 내렸다. 아기가 잠에서 깨더니 방긋 웃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아기의 까만 눈동자 그 흑진주 속에 자신의 상반신이 비쳤고 그 순간 그는 감동이 밀려 왔다. 동화작가 정채봉 씨의 본인 실화이다. 눈이 내리는 하얀 마당에 사랑하는 아기와 마주 보며 함박 웃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진다.

눈동자에 비친 사람의 모습을 눈부처라고 한다. 참 아름다운 우리 말이다. 필자는 가족의 갈등을 진료하는 일을 한다. 진료실에서도 이들은 서로 으르릉거리며 짝지의 말에 날을 세워 시빗거리를 찾으며 상대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다. 이들의 사랑이 회복되니 다시 마주 보며 웃음 짓고, 그 순간 이들의 눈 속에 피는 눈부처를 상상하면 흐뭇하다.

그런데 가족(家族)이나 정인(情人)이 아닌데도 타인들의 모습을 자신의 눈에 한가득 눈부처로 담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바로 기부하는 이들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베푸는 이의 눈빛은 얼마나 눈부실 정도로 반짝거리는지. 본보에 ‘그때 그 사람’ 코너에 소개된 노양주(70) 교장이 있다. 초임 교사 시절부터 아이들에게 들꽃을 사랑하는 심성을 키워 준 그는 시민들에게 자연을 기부했다. 2001년, 폐교된 척과초등학교 서사분교를 ‘들꽃학습원’으로 탄생시킨 산파 역할을 하고 초기 운영을 맡았다. 지금은 영남알프스학교 교장을 하면서 청소년과 시민에게 자연과 교감하는 재능기부를 해오고 있다. 그의 눈은 수많은 눈부처를 담아서인지 맑고 따스했다.

나눔과 봉사의 삶으로 본보에 소개된 다른 이로 ‘당사 외팔이 아저씨’로 유명한 임진용(68)씨가 있다. 어릴 때 감전 사고로 한쪽 팔을 잃었지만, 열심히 살다가 사업 실패와 이혼으로 우울증에 빠져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다행히 동생의 발견으로 살아난 그는 새롭게 태어났으니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싶어 생면부지의 이에게 신장을 기증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20년 넘게 배추와 무 농사를 지어 양로원 등 어려운 이들에게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그의 웃는 모습이 해맑다.

허명(68)씨는 19세부터 헌혈을 시작한 경상도 헌혈 왕으로 지금까지 655회 약 32만cc의 피를 헌혈했다. 중상환자 수술 시에 20팩이 필요한 것을 고려하면 그는 20명 이상의 생명을 살린 것이다. 헌혈을 위해서 술, 담배를 않고 등산으로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 이전 같지 않은 몸이라며 가장 아쉬운 것은 헌혈을 자주 못 하는 것이라며 선한 미소를 짓는다.

아등바등 살아가야 하니 강퍅한 세상이 분명한데 아직 살만하다면 이렇게 이어주는 이들이 있어서일 것이다. 차에 깔린 이를 위해 차를 번쩍 들어 올린 것은 지나가던 시민들이었다. 물에 빠져 떠오르지 않는 아이를 위해 망설임 없이 뛰어든 그들은 아이와 아무 관계가 없는 타인이었다.

사람의 스펙트럼은 악인에서부터 부처에 가까운 성인까지 넓다. 가장 나쁜 사람은 가장 아픈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성장 과정에서 어떤 지독한 아픔을 겪으면 타인의 삶을 무너뜨리면서 마음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고통을 겪었음에도 긍휼의 심성을 보이는 이가 우러러 보인다.

눈동자에 비친 사람의 모습이 아름다운 것은 그를 담고 있는 눈동자가 선하고 부처의 마음이기에 그런 것 같다. 우리가 상대의 눈에서 자신의 눈부처를 본다면 나쁜 말을 못 할 것이고 악한 마음을 먹지 못할 것이다. ‘세상인심은 어쩔 수 없어’ 하다가도 이웃의 이런 의인(義人)들을 보면 회의적인 마음을 가졌던 것이 부끄러워진다. 봄기운이 느껴지며 따스해진다. 봄꽃 향보다 더 진한 사람의 향기 덕분이리라.

한치호 마인드닥터의원 원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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