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탑이 논란이 되는 것은 신복 일대가 이미 오래전에 도시개발이 완료되어서 현재의 도시구조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교통 정체와 사고는 당장 일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도시 내부 가로의 교통제어는 신호등 시스템이 가장 효율적이다. 신복로터리의 경우도 신호체계는 운용되고 있지만, 광장 중앙에 탑이 있기 때문에 로터리 체계가 우선이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교통 관련 단체를 중심으로 탑을 철거하고 완전한 신호시스템을 갖추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처음으로 제2공업탑 철거 논의가 본격화한 것은 1999년경으로, 2002월드컵 경기를 위한 문수축구경기장 건설이 가시권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물론 이때도 신복로터리의 출·퇴근 시간대 교통 정체는 상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월드컵 경기 울산개최가 결정되자 신복로터리 교통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신복고가도로와 함께 삼호교~울산대 방향의 지하도로 건설이었다. 이 당시의 방침으로는 2000년 초까지 탑을 철거하고 2002년 3월까지 고가도로를 건설하기로 했는데, 실제로는 2001년에 현재의 신복 고가도로만 완공되었다.
한편, 탑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역사성과 같은 가치를 지키자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필자 역시 지난 2018년의 언론인터뷰에서 “(유신탑이라는 별칭이)부정적 시대상을 반영했지만, 울산의 관문을 40여 년이나 지켜온 상징적 의미가 있다. 오래 유지되어온 공공시설물은 도시의 기억 측면에서 가급적 남겨 둬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다.
제2공업탑 건설공사는 현대건설이 담당해서 1973년 7월에 착공했다. 탑 디자인은 당시 40대 초반의 동아대 건축과 교수가 맡았다고 한다. 탑 높이는 31.5m로 준공 당시 경상남도에서 가장 높은 탑이었다는 언론보도도 있다. 준공 당시 언론에서는 제2공업탑을 ‘울산공업단지를 상징’하기 위해 세웠으며, 탑신의 삼각형은 ‘총화, 기백, 도약’을 나타낸다고 했다. 이 탑은 10월 유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데도 언제부터인가 ‘유신탑’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고 있다.
그런데, 실제 ‘10월 유신탑’은 따로 있었다. 이 탑은 울산의 제2공업탑보다 9개월 빠른 1973년 3월에 경남 진해 육군대학 앞 로터리에 처음 세웠다가 이전했고, 1988년경부터 철거 논란이 시작되어 1990년대 중반 철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탑의 형상은 사각형 대좌 위에 민, 관, 군, 학생을 상징하는 인물상 4명이 거대한 10월 유신 법전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탑이라기보다는 동상에 가까웠다. 건립을 주도한 당시 진해시장은 군항제와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 박정희 대통령이 항상 참석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제2공업탑이 있는 무거동 일대는 1969년 12월에 울산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부산, 대구 구간이 고속도로로 처음 연결되었고, 1970년 7월7일에는 경부고속도로 전체 구간이 개통되면서 서울로도 직결되었다. 당시에는 이곳이 울산시와 울주군의 경계라는 성격이 강해서 관문 이미지가 있었지만, 울산광역시 승격 후에는 이런 이미지도 퇴색했고, 탑 건립 당시 논밭뿐이던 주변 일대도 고층아파트가 들어서는 등 큰 변화를 겪었다. 아무래도 탑에 안긴 가장 큰 상처는 2001년에 준공된 신복고가도로다. 그 때문에 탑의 상징성도 반감되었고, 울산고속도로에서 바라보는 풍경 속 주인공 자리도 이제는 탑이 아니라 고가도로다.
건립 목적도 모호한데다가 고가도로에 가려져서 애물단지 취급을 받고 있는 탑이 철거되면 차량 사고는 분명 크게 줄고, 보행거리가 단축되는 효과가 기대된다. 그러나 보행자 안전을 담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사람을 자동차로부터 보호하려면 자동차와 사람을 완전하게 분리하는 것이 제일이다. 이 경우 자동차 소통에도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주변 상권 활성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한삼건 울산역사연구소 소장·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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