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적 감성을 지닌 사람들이라야 이곳의 가치를 알아볼 것이라 했다.
일행은 간단하게 챙겨온 간식을 먹었다. 과일을 가져온 사람도 있고 과자를 가져온 사람도 있었다. 따끈한 커피를 챙겨온 사람도 있었다. 나는 김인후의 집에서 자고 나온 터라 아무것도 준비를 하지 못했다. 변명을 하느라 유촌 마을에서 자고 온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보니 미호천에서 나오는 홍옥석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번 행사에 초대를 받은 것도 운명 같다는 말도 곁들였다.
“머잖아 이곳을 배경으로 장편소설이 한 편 나오게 될 겁니다. 기대하셔도 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난 일들이 모두 소설 속에 녹아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김성범 작가님 열정은 알아줘야 해요. 잠시도 쉬지 않고 다음 작품으로 뛰어 드네요.”
일행은 돌아가며 준비해온 시를 낭송하기로 했다. 먼저 박경자 시인이 자신의 자작시 낭송을 했다. 수몰민들의 애환을 생각하고 지은 시인지 고향마을의 우물과 감나무를 소재로 한 시였다. 다음은 오늘 처음 만나는 김은경 시인의 차례였다.
“저는 이 모임에 초대 받았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K시인의 반구대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K시인의 반구대는 항상 무디어져 가는 내 감성을 깨우곤 합니다.” 나는 타인의 입에서 K가 튀어 나오는 걸 듣고 깜작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불벼락을 맞은 것처럼 온 몸이 달아올랐다. 그의 시가 김은경 시인의 입에서 튀어나오기도 전에 K의 목소리가 고막을 후려쳤다.

도끼로 내 머리를 내려치는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는 볼우물이 움푹 들어간 파리한 얼굴과 함께 미호천에서 주운 사람 얼굴 형상의 홍옥석이 같이 떠올랐다. 그리고 서재에 놓아둔 붉은 돌도끼가 함께 떠올랐다. ‘내 사랑 오늘도 별을 보고 누워 있네, 대곡천이 흐르는 바위절벽 위에서’
시 낭송의 첫 구절 외에는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멀리 댐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조금만 내려가면 천전리 각석이 있을 것이고 거기서 좀 더 아래로 내려가면 반구대 암각화가 있을 것이다.
김은경 시인의 낭송이 끝나고 다른 사람이 연달아 낭송을 했다. 그러나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벌써 2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흘러갔다. 손도 한번 잡아보지 않은 사람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누군가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두개골을 열고 이상한 칩 같은 걸 심어 놓은 것 같다. 어쩌면 생각만으로 가슴이 용암처럼 들끓는가?
“김성범 선생님은 가을 속에 푹 빠지신 것 같아요.”
오영수문학관 관장이 말을 걸지 않았으면 상상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수몰된 자기 마을에 와서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몸은 현재에 있으면서 마음이 온전히 과거로 돌아가 있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K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는 김은경 시인에게 K의 근황을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