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는 3월 1일은 제106주년 삼일절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마음이 향하는 곳이 있다. 바로 100여 년 전, 동구 곳곳에 항일 독립운동의 씨앗을 뿌렸던 민족사학 보성학교이다.
옛 보성학교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옛 학교 터에 세워진 보성학교 전시관이 치열했던 당시를 생생하게 보존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동구는 특히 항일 민족정신이 강했다. 방어진항은 1900년대 초 우리나라의 대표 어장 가운데 하나로 꼽힐 정도로 어업자원이 풍부했다. 일본인들은 방어진항의 어업권을 노리고 전략적으로 이주해 동구지역의 주요 경제권을 장악하고 경제적 번영을 누렸지만, 우리 주민들은 단순 노동자로 전락해 피폐하게 살아야 했다.
어린 학생들에게 민족정신 교육을 해야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성세빈 선생은 부친에게 부탁해 학교 부지를 마련하고, 뜻을 같이하는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1922년 동구 일산진 바닷가에 보성학교를 개교하고, 일제의 탄압으로 1945년 폐교할 때까지 총 21회에 걸쳐 49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보성학교는 당시 마땅한 교육기관이 없던 동구지역 어린이들에게 배움의 공간이 되었다. 특히 남녀 차별 없이 여성들에게도 공평하게 교육 기회를 제공해 당시 동구지역 여성들은 문해력이 꽤 높았다고 한다.
보성학교 교사들은 학생 교육 뿐만 아니라 항일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개교 당시 교장을 맡았던 성세빈을 비롯해 동생인 성세륭, 사촌동생인 서진문을 비롯해 김천해, 박학규, 이효정, 박두복 등이 보성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이 당시 동구지역 항일운동가 가운데 유일하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고 서진문 선생은 보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 한국인 노동자와 함께 노동 계몽운동과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일본의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 보성학교 학생이었던 동구 출신 학자 고 김병희 박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서진문 선생님은 나의 1학년 때 담임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교단에서 왜경에 잡혀갔다. 일곱 살이던 1924년의 일이었는데 학우들은 일산진 바닷가까지 뒤따라가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4년이 지난 1928년 선생님은 송장이 되어 돌아오셨다”고 회고했다.
보성학교 교장이자 설립자인 성세빈 선생은 신간회 울산지회 설립을 주도했으며, 청년으로 구성된 ‘오월청년동맹’과 어린이로 구성된 ‘적호소년단’ 등 민족 운동단체 결성을 이끌며 항일정신 확산에 큰 역할을 했다.
또, 성세빈 선생은 일제에 대항해 지역 청년들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축구대회를 열기도 했다. 보성학교 교사로 구성된 ‘동면구락부’는 일제강점기인 1925년 8월 16일 성끝마을 인근 들판에서 ‘동면축구대회’를 개최했다. 이 축구대회는 몇 년간 계속되다가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중단됐는데, 동면축구대회는 해방 이후 ‘8.15 축구대회’라는 이름으로 부활해 매년 광복절 즈음에 동구지역 단체들이 참여하는 축구대회로 자리 잡았다.
100여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보성학교로 상징되는 동구의 민족정신은 우리 주민들의 노력으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지역 주민들은 앞장서 보성학교 복원을 추진하고 보성학교와 성세빈 선생의 이야기를 동화책으로 발간하고, 인형극으로 만들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생을 바쳤던 100년전 이야기를 어린이들에게 알리고 있으며, 성세빈 선생의 생가를 찾아가 주변 환경을 가꾸며 후손들의 노고를 기리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동구 보성학교 설립자인 성세빈 선생과 보성학교에서 함께 활동했던 여러 항일운동가에 대한 국가적 예우는 많이 미흡한 상황이다.
개인적인 안락함을 버리고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38년에 사망한 성세빈 선생을 기억하고, 목숨 바쳐 나라를 지켰던 분들의 삶이 오늘에라도 제대로 평가되어 그분들의 희생에 걸맞는 국가적 예우가 하루 빨리 이뤄질 수 있도록 모두가 관심을 갖기를 희망한다.
김종훈 울산 동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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