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햇살을 찍으면 이토록 선명한 색이 될까. 메마른 가지 끝마다 올라앉은 설렘을 본다. 삼삼오오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생기가 가득하다. 봄은 터지기 시작하는 팝콘처럼 연쇄적이다.
통도사에서 봄을 만났다. 수령 370년 이상인 노목은 가지마다 조롱조롱 꽃망울을 달았다. 고승의 영정을 모신 영각(影閣)의 단청을 배경으로 봄이 돋을새김 되었다. 어느 대단한 화공이 이렇게 그려낼 수 있을까.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지만, 톡톡한 햇살과 어울려 자장매는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한 빛깔로 돋보인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나무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봄을 연다. 꽃이나 잎을 먼저 틔우거나 둘을 함께 내보내는 나무도 있다. 매화, 산수유, 개나리, 벚꽃, 생강나무는 꽃이 먼저 봄을 연다. 겨우내 저장해둔 양분을 한순간에 터뜨려 곤충을 부른다. 벌과 나비가 많지 않은 시기라 가루받이를 쉽게 하기 위한 전략이다. 아직은 무채색이 많은 계절, 메마른 가지에 핀 선명한 꽃은 봄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진달래, 철쭉, 복숭아나무, 라일락은 꽃과 잎이 함께 돋아난다. 에너지를 골고루 사용하려는 전략이 숨어 있다. 꽃은 수분을 위해 곤충을 유인하고, 잎은 햇살을 머금고 영양분을 만든다. 이들은 어느 한쪽도 기울지 않도록 균형 있게 성장한다.

꽃보다 잎을 먼저 내는 나무도 있다. 참나무, 단풍나무, 느릅나무류는 가루받이에 바람을 이용한다. 꽃을 피우기 위해 서두를 필요가 없다. 대신, 잎을 먼저 내어 광합성을 시작한다. 영양분이 충분히 모이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잎을 낼 것인가, 꽃을 피울 것인가. 식물은 미래를 위해 어떤 것에 집중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안다. 그런 전략이 있었기에 매년 이맘때면 노거수의 어깨에 봄이 앉는 것이겠지. 오래된 약속처럼.
아니, 그토록 오랜 세월 영각 앞을 지켰다면, 이미 정령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햇살이 노거수를 쓰다듬는다. 기다렸다는 듯 꽃잎이 터진다. 아찔한 봄 내음이 번져간다.
송시내 나무의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