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섬이 나를 불렀어.”
친구의 문자 아래에는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 호박 앞에서 찍은 사진이 있었다. 얼마 전부터 만날 때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고 하더니. 여행지여서 그런가? 수줍은 성격의 그녀답지 않게 호박 작품에 기댄 채 하늘을 향해 브이를 만든 손을 쭉 뻗어 올리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그녀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하늘로 울려 퍼지는 것만 같다. 어느새 계절은 연둣빛에서 푸르름으로 짙어지고, 정신 없이 흘러간 오월의 끝자락. 오후의 느긋한 햇살 아래 문득 들어온 사진 한 장이, 마치 아주 먼 곳에서 온 초대장처럼 오늘 내 하루를 흔든다.
그렇다. 여행은 먼 곳에서 낯선 초대장에 응답하는 일이다. 그 여정은 나에게서 떠나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 위에 있다. 현실이라는 단단한 벽에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종종 그런 부름을 듣는다. 굳어진 자아를 벗고, 새로운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여행이다. 이런 여정은 친구 사진 속의 호박 작가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에서도 체험할 수 있다. 야요이의 대표 설치작 ‘무한 거울 방’(Infinity Mirrored Room)이 그것이다. 이 방은 바닥, 천장, 벽 모두 거울로 둘러싸여 있고 LED 조명, 반짝이는 공 모양의 오브제들이 일정한 패턴으로 매달려 있다. 관람자가 안으로 들어가면, 자신의 모습이 거울에 무한히 반사되어 끝없는 자기 복제를 체험하게 된다. 낯선 도시의 어느 카페의 창가에 앉아 있는 나, 다른 언어로 말하고 다른 리듬으로 낯선 골목을 걷는 나. 이들은 모두 ‘나’인 동시에, 처음으로 만나는 ‘나’가 존재한다.
이제 현재의 ‘나’는 서서히 없어지고, 아득한 우주의 한 공간을 유영하는 듯한 작고 무한한 ‘나’와 마주한다. 쿠사마는 이 체험을 “나는 사라지고 오직 점만 남는다”라고 말한다. 낯선 도시에서, 길 위에서 우리는 익숙했던 ‘나’가 점점 흐려진다. 관계도, 직함도, 부모나 자식으로서의 역할도 사라진다. 남는 것은 아주 작고 낯선 ‘감각’으로서의 ‘나’이고, 이 빈자리에 새로운 내가 들어선다. 이전에 보다 더 자유롭고 유동적인 나.
여행 역시 그러하다. 익숙한 삶의 틀을 벗고, 타인의 지점에서 잠시 벗어나 보는 일. 떠나는 존재가 반드시 어디를 도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내가 누구인지 몰랐던 그 감각을 허락하는 시간이다. 섬의 초대장을 받은 그녀는 어쩌면 자신을 일부러 잃어버리기를 갈망했는지도 모른다. 그 갈망이 먼 곳에 있는 섬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도. 그리고 나는 문득 깨닫는다. 여행은 결국 어디를 가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벗고 떠나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그녀가 섬에서 잃어버린 건 단지 일상의 무게가 아니다. 더 넓은 나로 나아가기 위해 내려놓은 이전의 자아였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나를 찾기 위해서 한 번쯤은 나를 잃어야 한다.
장훈화 서양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