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황량한 붉은 행성 한가운데, 한 남자가 홀로 남겨졌다. 숨 한 번 편히 쉴 수 없고, 물 한 방울 구하기도 힘든 화성. 동료들은 떠났고, 구조의 희망은 끊겼으며, 지구는 아득히 멀었다. 그러나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마크 와트니. 그는 과학자였고, 생존자였으며, 무엇보다 기록자였다. 그는 매일 카메라 앞에 앉아 누군가 언젠가 볼지도 모를 영상 속에 말을 남겼다. 농담처럼, 때로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살아 있다. 지금 이 순간을 버티고 있다.”
그는 생존을 하나의 수학 문제처럼 풀어갔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고, 또 하나를 풀어가며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감자를 심고, 고장 난 기계를 고치며,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절망의 상징 같던 화성에서 그는 결국 살아남았다. 그를 지탱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의미’였다. 영화 ‘마션’의 주인공 마크 와트니 이야기다. 빅터 프랭클은 말했다. “고통 그 자체가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다. 고통에 아무 의미도 없다고 느낄 때, 인간은 무너진다.” 와트니는 생존이라는 외형 너머에 스스로 살아야 할 이유를 만들었다. ‘기록하자’ ‘남기자’ ‘돌아가자’ 그 간절한 의미들이 그를 살렸다. 그의 고통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존재의 증명이었다.
고요한 밤, 거실의 불을 끄고 문득 생각한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정든 직장을 떠났고, 누군가는 퇴직을 앞두고 있다. 한때는 수십 년 동안 조직의 중심에서 존중받았고, 역할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실감했다. 이제는 모든 보호막이 사라진 채, 다시 ‘나’라는 낯선 존재와 마주해야 한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이, 진짜 나로 살아갈 수 있는 출발점이 아닐까. 심리학에서는 이를 ‘역할 상실 이후의 정체성 재구성’이라 부른다. 누군가의 부하였고, 상사였고, 동료였던 내가, 이제는 ‘한 인간’으로서 내 존재의 이유를 다시 써 내려가야 한다.
퇴직은 끝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의미를 짓는 전환점이다. 우리는 지금, 각자의 화성에서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재취업이든, 창업이든, 그것은 단지 생계를 위한 일이 아니다. 내가 내 삶을 다시 선택했다는 증거다.
“성장은 고통 너머의 의미에서 시작된다.” 아브라함 매슬로의 이 말처럼, 삶의 방향은 고통을 피하는 데 있지 않다. 그 고통 안에서 의미를 찾는 데 있다. 필자는 지금, 매일 사망사고를 분석하고, 안전칼럼을 쓰며, 컨설팅 일도 한다. 이 일은 내게 존재의 이유이며, 가족에게는 든든한 기둥이고, 사회에는 꼭 필요한 역할이다. 마크 와트니가 했던 것처럼 정리되지 않은 하루라도 기록하자. 그 기록이 언젠가 나 자신을 구할 구조신호가 될지 모른다. 의미를 잃지 않는 자는 살아남는다. 아니, 단지 살아남는 것을 넘어, 다시 빛나는 존재로 태어난다. “나는 괜찮다. 지금도 이렇게 걷고 있다.” 이 말을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되뇌어보자. 오늘 하루를 살아낸 당신은 이미 의미있는 존재다.
정안태'오늘하루 행복수업' 저자·울산안전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