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환의 건축과 여행 그리고 문화(66)]은둔의 도시, 카파도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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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의 건축과 여행 그리고 문화(66)]은둔의 도시, 카파도키아
  • 경상일보
  • 승인 2022.02.1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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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건축학

카파도키아는 화산재가 굳어서 만들어진 응회암의 독특한 지질을 갖는 지역이다. 구릉 형태의 산들이 간혹 나타나기도 하지만 거의 평원으로 이루어진다. 바위 언덕은 나무가 자라지 않는 민둥산의 형태여서 목재로 집을 짓기도 어렵고, 외적이 쳐들어오면 숨을 곳이 마땅치 않다. 로마시대에 기독교 신앙을 지키려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이 이곳에서 박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바위굴을 파고 숨어사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개미굴처럼 땅을 파고들어가 지하도시 데린쿠유를 만들었다, 규모가 큰 것은 깊이 85m, 지하 20층의 규모로서 5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하에 거주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환기와 급배수가 이루어져야 한다. 지름 1m 정도의 수직터널을 우물형태로 뚫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도시로서의 체계를 갖춘 셈이다.

적들이 침입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좁고 구불구불한 통로와 육중한 돌문과 함정을 설치했다. 베트남 전쟁 때 만들어진 땅굴이 연상된다. 통로는 각 층의 작은 광장과 같은 홀로 연결되고, 여기에서 여러 방향의 통로로 분기되어 각 집으로 통한다. 집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창고, 우물, 축사, 포도주 저장고 등 공동시설도 갖추었다. 두더지처럼 햇빛을 보지 못하고 숨어 살았던 삶의 양식을 선택할 만큼 종교의 자유가 중요했을까. 일상적인 거처라기보다 일시적으로 대피할 수 있는 방공호 성격으로 보인다.

▲ 화산재가 굳어 만들어진 응회암 바위산들이 빗물과 바람에 씻기고 깎여 기암괴석이 돼 장관을 이루고 있는 카파도키아.
▲ 화산재가 굳어 만들어진 응회암 바위산들이 빗물과 바람에 씻기고 깎여 기암괴석이 돼 장관을 이루고 있는 카파도키아.

카파도키아가 유명한 것은 독특한 지형으로 형성된 기괴한 경관 때문이다. 화산재가 굳어 만들어진 응회암 바위산들이 빗물과 바람에 씻기고 깎여 기암괴석이 된 것이다. 그 바위들이 너른 벌판에 수없이 솟아있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자연이 만든 조각품들을 전시한 거대한 전시장인 셈이다. 혹 버섯모양으로도 또는 남근 모양으로도 보이는 바위기둥들은 기괴하지만 결코 공포로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만화영화 스머프에 등장하는 버섯 집들처럼 장난스럽기까지 하다. 스페인의 위대한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Antoni Gaudi)가 설계했던 까사 밀라(Casa Mila) 저택의 옥상이 떠오른다. 그 기괴한 형상의 조형물들이 이곳에서 발상되었다고 해도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기독교인들은 이 바위 계곡에도 수많은 암굴을 조성했다. 암굴은 쉽게 노출될 수 있는 곳이다. 남의 눈을 피해 숨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면 암굴을 팔 이유가 있었을까, 초기 기독교인들이 카파도키아에 정착한 배경도 의문이다. 사도들이 전도했던 장소는 주로 에게해에 면한 도시였다. 에페소, 이즈미르, 베르가마, 히에라 폴리스 등 전교 초기에 형성된 일곱 교회에서 볼 수 있듯이 인구가 많은 상업도시에 집중되었다. 대평원이 펼쳐진 황량한 내륙지역에 포교를 위해 정착했다는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수도처였을 가능성이 높다. 초기 수도자들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광야에 암자나 동굴초막, 오두막을 지어 은거하면서 기도와 명상으로 고립된 생활을 영위했다. 이들에게 카파도키아의 기괴한 지형은 은둔과 수도, 신비한 신앙적 체험을 얻기에 적절한 장소가 아니었을까. 이곳의 종교유적들이 기독교 공인 이후인 9~13세기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과 수도생활에 적합한 소규모 시설이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7세기 후반에 이슬람 세력이 아나톨리아를 침공하면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하게 된다. 단기간에 많은 인구가 몰려들면서 주택수요가 급증했다. 지하도시가 만들어진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11세기 이슬람교를 앞세운 셀주크 왕조는 기독교인들과 평화로운 공존을 선택했다. 개종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기독교 건축을 파괴하지도 않았다. 15세기 오스만 제국 이후에도 종교적 관용정책은 지속되었다. 가장 많은 파괴는 기독교가 국교화되었던 비잔틴 제국시대에 일어났다. 8~9세기 비잔틴 제국의 우상파괴 운동으로 초기 기독교 벽화들이 대량으로 파괴된 것이다.

동굴은 장식이 거의 없는 토굴형태가 대부분이다. 금욕과 절제된 생활로 기도와 명상에 집중했던 수도공간이라면 내부공간을 화려하게 꾸밀 하등의 이유가 없었으리라. 그러나 몇몇의 동굴에서는 마치 화려한 도시 성당처럼 채색 성화로 장식된 사례를 볼 수 있다. 예배처로 만든 것이 분명하다. 황량하고 기괴한 계곡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화려한 색채와 황금빛의 강렬한 대비는 신비스러운 영적세계를 연출한다.

괴레메 계곡에 남아있는 동굴벽화는 대부분 9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천정과 벽에 그려진 성화들은 비잔틴시대의 민화적 표현이다. 특정한 교리를 전달하기 위한 전문 화가의 솜씨가 아니다. 성서의 내용과 신앙을 고지식하게 전달하는 민간의 표현이다. 비록 투박하고 서투르지만 날것 그대로의 민속적 진솔함이 느껴진다. 이것은 서로마 교회에서 정교하게 정제된 성화와 다르다. 제도권 교리를 전문화가의 솜씨로 표현하는 고딕시대 이후의 성화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체험이다.

그들은 여기에서 무엇을 했을까? 석가나 예수처럼 명상에 빠졌을까? 신비로운 예배 의식을 치렀을까, 동굴은 수도처에서 점차 예배당의 모습을 갖추어갔다. 그들은 이 황량하고 괴기스러운 땅에 예수와 사도들의 이야기로 신비로운 세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지형의 신비스러움은 더 이상 성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은둔의 계곡은 소란스러운 관광지로 변했기 때문이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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