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곤의 살며생각하며(26)]소시민들의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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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곤의 살며생각하며(26)]소시민들의 법
  • 경상일보
  • 승인 2022.03.02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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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곤 철학박사·칼럼니스트

소시민들은 법을 존중하면서 살아간다. 법은 우리의 일상이 평안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뒤에서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존재다. 법을 집행하는 검사와 판사들에게 깊은 신뢰를 부여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법의 판단에 자신의 일을 맡기는 일은 일생에 몇 번 되지 않는다. 소시민들의 이러한 법 감정과는 다르게 법을 쉽고 편리하게 이용하는 사람도 많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경우에만 아니라 무엇인가를 감추고 왜곡하는 일에도 고소 고발과 같은 제도를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방송이나 신문에서 오르내리는 권력자들이나 주변 가족들이 법에 의존하는 이유가 단순히 자신의 억울함을 해소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소송이라는 수단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타인을 넘어뜨리고 부를 빼앗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에게 사법제도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자신들의 정의를 만들어 가는 매우 효율적이고 강력한 수단인 것이다. 법 절차에 익숙하거나 이 분야의 전문가가 곁에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평범한 사람은 고소나 고발의 정확한 차이도 모르고 산다. 고소는 자신의 일과 관련된 일이고 고발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행동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다. 이런 수준의 상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고소와 고발을 하고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두렵고 힘든 일이다.

고소 고발이 횡행하는 시대는 고대에도 있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인들은 모든 문제를 소송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민주주의를 처음으로 시도한 아테네는 개인이나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합의 수단으로 소송제도를 채택했다. 다수의 의견이 항상 현명한 판단이고 이것은 배심원들의 투표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사람들 간의 분쟁뿐만 아니라 사소한 옳고 그름의 문제까지 법정에서 다투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상을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희극에서 이렇게 풍자했다. 한 학생이 무지한 농부를 지도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도를 자랑한다. “여기에 세계 지도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가 아테네입니다.” 농부는 이렇게 대답한다. “자넬 믿지 못하겠어. 배심원들은 어디 있나?” 무지한 농부도 소송을 통해서만 사실을 파악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정능력을 잃어버린 시민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인가를 우려하는 그리스 희곡이다.

이러한 소송만능적인 풍조는 문학 작품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어이없는 결과를 불러오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그것이다. 세계적인 현인으로 불리는 그도 고소 고발의 희생양이 되었고 소송제도의 그물을 벗어나지 못했다. 거리에서 젊은이들에게 스스로를 돌아보라고 가르치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새로운 신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음해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가르치는 인간에 대한 진리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고 고발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 앞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죄목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가를 설명하면서 고발자의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한다. 그러면서 배심원들에게 간곡히 당부한다. “내말이 진실인가 하는 점만을 고려하고 이 점에만 주의를 기울여 주십시오. 말하는 자는 진실을 말하고 재판관은 정당하게 결정하도록 합시다.” 그러나 배심원들의 판단은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고발자가 만들어 놓은 여론과 사회적 분위기를 벗어날 수 없었다. 합리적인 언어와 상식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소송결과를 지켜본 그의 제자 플라톤은 배심원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의 언어를 기록으로 남겼다. 그것이 플라톤의 저서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다.

어느 시대에나 옳고 그름을 정확히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그래서 예로부터 정의가 무엇인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재판관을 성직자와 같은 반열에 놓고 존경했다. 지금도 재판정에서 판사와 검사가 성직자와 비슷한 제복을 입고 재판을 진행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최고법원의 구성원과 관련된 물의를 보노라면 법복을 입은 사람들의 양심도 그들이 입은 제복처럼 엄숙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인간적인 욕심보다는 재판관으로서의 양심에 따르는 판결이 국민이 입혀준 옷에 값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김상곤 철학박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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