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환의 건축과 여행 그리고 문화(70)]하늘로 돌아가는 곳, 다흐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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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환의 건축과 여행 그리고 문화(70)]하늘로 돌아가는 곳, 다흐메
  • 경상일보
  • 승인 2022.06.10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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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건축학

오아시스 도시 야즈드를 나서면 황량한 사막이 펼쳐진다. 생명력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황야가 멀리 지평선을 그리며 사라진다. 도시 근처에서 가장 높은 곳은 남쪽으로 15km 거리에 두 개의 봉우리를 가진 언덕뿐이다. 낮은 언덕이지만 도시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장소다. 언덕의 정상부에는 ‘침묵의 탑’이라고 부르는 조장터가 자리한다. 왼쪽 높은 것이 남성용, 오른쪽이 여성용이라고 한다. 페르시아어로 다흐메(Dakhmeh)라고 부르는 이 조장터는 조로아스터교 장례문화의 유산이다. 시신을 새 먹이로 주는 장례방식은 우리에게 너무도 생경하다. 조장(鳥葬)은 과연 야만적이고 미개한 문화적 관습일까.

조로아스터교에서는 모든 피조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여 자연을 경외하고 감사하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자연 그대로의 순수함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특히 물과 흙의 신성함을 지키려 했다. 그들에게 시신은 영혼이 떠난 불결한 대상이었다. 죽은 지 세 시간이 지나면 부패의 악마가 달려든다고 믿었다. 시신이 불과 물과 흙, 공기를 오염시키지 않도록 시신을 날짐승에게 맡겨 처리했던 것이다. 시신을 길바닥에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다. 조장을 행하는 특별한 장소가 있고, 그곳은 도시와 하늘 세계를 연결하는 실존적,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 야즈드의 조장터. 다흐메(Dakhmeh)라고 부르는 이 조장터는 조로아스터교 장례문화의 유산이다.
▲ 야즈드의 조장터. 다흐메(Dakhmeh)라고 부르는 이 조장터는 조로아스터교 장례문화의 유산이다.

다흐메는 도시의 경계에 우뚝 솟아있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영험한 기운을 내뿜는다. 거친 바위 절벽, 짙은 음영이 드리운 언덕의 중량감과 실루엣이 하늘로 치솟는 상승감을 강화시킨다. 그 거칠고 황량한 모습은 그대로 외경이 된다. 풀 한 포기 없는 메마른 바위산이 도시의 생명력과 강한 대비를 이룬다. 정상으로 오르는 경사로마저 장례 행렬의 과정이다. 행렬은 고인이 살았던 도시를 바라보며 천천히 탑을 향해 오르게 된다.

언덕의 정상부에는 성벽을 축조하여 ‘특별한 장소’를 만들었다. 그것은 정상 위에 솟은 또 하나의 산. 흙벽돌의 질감과 솟아오른 형태가 산의 형태감을 연장시킨다. 지형이라는 불규칙한 매스와 성벽이라는 인공의 규칙적 형상이 강한 대비를 이룬다. 올려다보면 거창한 요새의 성곽처럼 보이나 성벽 안은 비어있다. 성벽은 신성한 터를 은폐시키는 최소한의 장치일 뿐이다. 그곳은 망자의 영혼이 하늘로 떠나는 의식을 행하는 특별한 장소가 된다.

성벽 안은 고요하다. 어떤 상징이나 장식, 문양도 보이지 않는다. 거칠고 투박한 성벽이 슬픔도 분노도 절제시키며 무겁고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침묵의 탑’이라 부르기에 너무나 적합한 장소이며, 공간이다. 망자의 육체는 더 이상 땅을 더럽히지 않고 독수리를 통해 하늘로 사라지며, 영혼은 천당으로 향하게 된다. 어쩌면 평범했던 이승에서 그들의 삶도 이러한 의식을 통해 특별해지고, 성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도시와 산은 서로 격리되어 있지만 의식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언덕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이승의 공간과 이 언덕 위에서 향하는 저승의 공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매개적 장소가 되는 것이다. 시신은 사라졌지만 이 산과 탑은 저승으로 향하는 공동체적 관문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묘지가 시신을 모신 추모의 장소라고 한다면, 침묵의 탑 또한 공동체적 추모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조장은 오늘날 이란에서조차 더 이상 존속되지 않는다. 대신 다흐메 근처에 공동묘지를 조성하여 매장하고 추모의 공간을 만들었다. 매장법으로 전환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침묵의 탑 주변을 맴돌고 있다.

야즈드의 다흐메는 오늘날 우리의 장례문화를 돌아보게 한다. 근대화 시기 이전까지 우리는 매장문화를 전통으로 이어왔다. 장례가 끝난 후 시신은 대개 뒷산에 있는 묘지에 묻히게 마련이었다. 거기에서 망자의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백은 후손 곁에 남아있다고 믿었다. 비록 신령스러운 모습은 아니더라도 뒷산은 선조의 공간이며 추모의 공간이었다. 후손들이 그곳을 통해 삶의 지속과 순환, 선조에 대한 추모를 인식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오늘날 망자의 시신은 자신이 살던 집, 동네에서도 추방된다. 장례 관련 시설은 혐오시설로서 모두 기피하고 외면한다. 주민들의 반대가 덜한 도시 외곽으로 쫓겨나 장례식장이라는 이름으로 숨게 마련이다. 병원 영안실만이 도시의 중심에서 합법적인 시신 처리의 과정을 보증받고 있다. 그리고 유해는 화장장에서 먼지가 되어 쓰레기처럼 버려지든가, 또는 납골당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게 된다.

죽음은 도시라는 삶의 공간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선산마저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파헤치고, 선묘는 이장을 요구받는다. 산을 깎아 세운 고층 아파트들이 죽은 자들의 공간을 대체한다. 죽음이 배척된 자본주의 도시 공간에서 망자에게 허락된 땅은 거의 없다. 망자를 기억할 어떤 장소나 기념물조차 남기지 않는다. 도시는 산 자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상업적으로 소비되는 공간일 뿐이다.

유서 깊은 유럽 도시의 중심부에서 공동묘지를 만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곳은 대부분 도시공원으로 아름답게 관리되고 있다. 그곳은 명망가를 추모하는 사적공간이 아니라 시민을 위한 공적공간이다. 선조들의 안식처이며 후손의 공원으로서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공생한다. 걸작을 남긴 위대한 예술가, 철학자, 정치가,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이 도시를 살다 간 모든 사람들이 추모의 대상이 된다. 그곳을 통해 삶과 죽음이 연결되고, 연속되며, 순환한다. 땅값이 싸기 때문일까? 천만에! 그것은 죽음을 인식하고 예우하는 그 사회의 수준이다. 죽음을 대하는 인문적인 태도에서 우리는 아직 미개 문명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강영환 울산대학교 명예교수 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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