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의 명당]장원급제자·독립운동가 등 울산 움직인 쟁쟁한 인물들 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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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 울산의 명당]장원급제자·독립운동가 등 울산 움직인 쟁쟁한 인물들 배출
  • 전상헌 기자
  • 승인 2022.06.13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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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동어른’ 이재락은 영남을 대표하는 유림으로 풍수가들이 명당이라고 말하는 근재공 고택에서 태어나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이 집에서 살았지만 개인적으로는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러야 하는 등 힘든 때가 많았다.

지난달 문화재청이 마련한 ‘고택문화재 활용사업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전국에서 20여 명의 관계자들이 울주군 웅촌면 석계리에 있는 ‘학성이씨 근재공 고택’을 방문했다.

이들은 이날 특히 이의창(李宜昌) 6대손으로 학성이씨 근재공 고택에 살면서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재락 옹의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이날 근재공 고택을 방문했던 사람 중 이 집이 울산에서 손꼽히는 명당이었다는 사실을 안 사람은 드물을 것이다.

풍수가들은 명당의 조건으로 풍광이 좋아야 하고 인물이 나고 그리고 재물이 모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근재공 고택은 이런 조건을 다 갖추었다.

자연풍광으로 보면 석천마을은 노방산을 병풍삼아 산 지형이 동네 좌우로 펼쳐져(背山臨水) 마치 광주리 모양 또는 조개 모양으로 동네를 감싸고 있고 마을 한가운데는 넓은 들판이 있다. 들 앞으로는 회야강이 서편에서 동편으로 흘러 경치가 좋고 사람이 살기 좋은 곳임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도 근재공 고택이 자리 잡은 곳이 흡사 조개가 진주를 품은 형상이 되어 명당으로서는 이보다 좋은 조건이 없다고들 말한다. 인물을 얘기하면 조선 시대 울산에서는 4명의 장원 급제자가 나왔는데 이 중 2명이 이 집 출신이다.

재물 역시 대부분의 울산 부자들이 당대 혹은 2대를 가지 못했지만 이 집은 6대가 3000~4000석을 누리면서 살았으니 명당의 조건에 맞다 하겠다.

근재공 고택을 자기 손으로 지은 의창은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웅촌면 대여리 중대마을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가 석천으로 온 것은 풍수가를 도운 선행 때문이었다. <웅촌면지>는 의창이 석계에 온 사연을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고 있다.

옛날 온양읍 남창리의 한 부자가 재물이 불꽃처럼 일어나자 이런 부귀영화를 영원히 누려야겠다는 욕심으로 좋은 묘 자리를 구하기 위해 당시 대구에서 풍수를 잘 본다는 앉은뱅이 국풍을 불러왔다.

그리고는 문중 산소가 있는 대운산으로 국풍을 모시고 갔다. 그런데 이 국풍이 문중 산소를 오랫동안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문중 산소를 하루 빨리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두면 집안에 줄초상이 난다”면서 “빨리 산소를 옮겨야 화를 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문중 사람들이 국풍의 말을 듣고는 “그동안 우리 문중이 이곳에 산소를 쓴 후 재물이 불같이 일어나고 권세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데 무슨 막말을 하고 있느냐”고 국풍을 나무란 뒤 “너 같은 놈은 이곳에 있다가 호랑이 밥이나 되어야 한다”면서 국풍을 그 자리에 버려두고 모두 산에서 내려갔다.

이러다 보니 혼자 힘으로 꼼짝도 할 수 없었던 앉은뱅이 국풍은 산속에서 호랑이 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날 국풍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국풍을 구경하기 위해 산에 갔던 의창의 노복이 국풍의 이런 처지를 보고 지게에 싣고 의창 집으로 모시고 왔다.

이런 사정을 들은 의창은 국풍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라고 노복에게 지시했다.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국풍이 의창에게 명당 집터를 찾아주겠다고 해 잡아준 장소가 지금의 근재공 고택이었다.

며칠 뒤 국풍은 의창에게 명당 집터를 보러가자면서 집을 나온 후 회야강을 따라 하류로 가자고 했다. 그런데 초천 약수터를 지나 석천 벼락덤 위에 도착한 국풍은 이곳에서 북편을 보더니 동뫼쪽으로 가자고 다시 말했다. 동뫼는 현재 우석 이후락 생가 바로 남쪽으로 지금은 이 산에 철탑이 서 있다.

그래서 국풍과 함께 동뫼쪽으로 가니 국풍은 동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금의 근재공 고택 자리에 말뚝을 박도록 하고는 집을 짓는 방향까지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당시 이곳은 보리밭이었는데 의창은 보리밭을 사들인 후 이곳에 집을 지었다.

당시 의창이 사들인 보리밭이 무려 4400여 평(약 1만4545.5㎡)이나 되었는데 이 땅에 집을 지은 후 집 뒤 터에 인삼과 사과나무를 심었더니 수확이 좋아 일시에 재산이 불었다고 한다.

지관들에 따르면 석천마을은 노방산 능선이 서진하면서 광주리 모양으로 감싸고 그 광주리 안에 붕어가 있는 형태인데 근재공 고택은 꼬리 부문이고 그 남쪽 동뫼가 몸퉁 그리고 동뫼 남쪽이 머리 부분에 해당된다. 붕어는 꼬리가 가장 힘이 세기 때문에 근재공 고택이 명당이라고 한다.

다만 붕어가 회야강으로 헤엄쳐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붕어 머리 부분에 해당되는 동뫼 남쪽에 옛날에는 연못을 파고 붕어가 힘차게 놀도록 기화요초를 심었다고 한다.

근재공 고택에서는 인물도 많이 났다. 대과급제 장원만 해도 의창의 차남 근오와 내손(來孫) 석진이 나왔다. 근오는 나이 30에 진사과에 입격하고 이듬해 대과 증광시 병과에 급제한 후 정조 15년(1791) 승문원 부정자, 성균관 박사, 교서관 박사, 성균관 전적 그리고 순조2년(1802)에는 후릉령에 이어 병조정랑이 되었다.

석진은 고종 31년(1894) 25세에 조선의 마지막 과거인 전시 병과에 급제한 후 통사랑 승무원 부정자로 있었으나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후 석계에서 낚시를 하면서 살다가 타계했다. 석진은 울주군의회 의장을 지냈던 동석의 조부로 지금도 석진이 말을 탈 때 오르내렸던 하마비가 동석의 집 앞에 있다.

학문과 품행을 겸비했던 근오의 손자 장찬도 뛰어난 문사였다. 철종 3년(1832) 사마시 생원과에 입격했던 그는 당대 세도가였던 이조판서 김병기, 영의정 김병학·김병국 형제 등 안동김씨 일문과 필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문필이 뛰어났고 친교가 있었는데 당시 김씨 문중에서 보낸 편지와 서책이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다.

의창 후손으로 근재공 고택에 살았던 인물 중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율동어른’ 이재락이다. 이 옹은 호가 강석(江石)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호 대신 그를 존경해 율동어른이라 부르기를 좋아했다.

근재고택의 주손으로 어려서부터 가풍을 이어받아 한학을 수학했던 율동어른은 남창 3·1운동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내내 사돈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과 함께 군자금 모금에 앞장서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1919년에 고종 장례식에 참석차 서울에 갔다가 만세운동을 보았던 율동어른은 독립선언서를 갖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학성이씨 문중이 중심이 되어 남창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종용해 4월8일 남창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25년 8월에는 심산이 독립군 기지를 건설할 자금 20만원을 모금하기 위해 중국에서 몰래 국내로 들어왔을 때 이에 찬동해 200원의 거금을 내어놓은 후 아들 동립과 함께 영남 일대를 돌면서 군자금 모금에 나섰다.

2차 모금 때도 1차 모금 때 보다 훨씬 많은 800원을 내어 놓았던 율동어른은 이때 영남 유림들이 군자금 모금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런 호소에도 불구하고 자금이 모이지 않자 1926년에는 그동안 소액을 기부한 국내 친일 부자들에게 더 많은 돈을 기부토록 종용할 것을 결정하고 이를 추진하던 중 왜경에 체포되었다.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후 재판에 넘겨진 율동어른은 1927년 3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고 집으로 와 조국이 광복되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어렵사리 찾은 광복이었지만 광복은 그에게 기쁨만 주지는 않았다. 광복 후 한동안 빨치산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던 그는 1960년 석천리에서 향년 75세로 눈을 감았다.

그는 해방 전후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영광을 누렸지만 나라가 빼앗긴 시대에 살아야 했기에 옥고를 치러야 하는 등 힘든 일이 많았다. 더욱이 이런 영광이 그의 대에 끝난 것을 생각하면 부귀영화를 자자손손 누릴 수 있는 명당은 없는 것 같다.

장성운 지역사 전문가·울주문화원 이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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