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곤의 살며 생각하며(61)]절실한 마음이 노년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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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곤의 살며 생각하며(61)]절실한 마음이 노년의 선물
  • 경상일보
  • 승인 2025.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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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곤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새로운 여행지를 찾아 떠나는 기쁨을 최고의 낙으로 여기는 친구가 있다. 그의 여행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대륙은 남미가 유일하다. 언제 남미 대륙으로 떠날 것인가를 부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이 여행을 방해하는 일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여행 비용도 충분하고 장시간의 비행을 견뎌낼 건강도 있다. 또 오랜 여행에서도 사소한 충돌조차 없었다는 아내가 든든한 여행 동지다.

얼마 전에 만난 친구는 새로운 유형의 유럽 여행을 시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의 구석구석에 숨겨진 아름다운 마을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부럽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참 좋은 계획이라고, 우리 나이에 잘 어울리는 여행이라고 진심으로 축하했다. 반응은 예전과 달리 담담했다. 마지막 유럽 여행이 될 것이라 말하는 그의 표정에는 약간의 비장함도 있는 것 같았다.

먼 나라로 떠나는 즐거움을 평생 추구해온 사람에게서 듣는 뜻밖의 말이었다. 여행에 필요한 외부 조건이 변한 것도 아니었다. 여행자의 내면이 변한 것이다. 여행을 갈망하는 마음이 줄어들고 기대와 설렘보다 걱정이 먼저 찾아온 것이다. 일상을 지탱하는 중요한 힘이 여행에 대한 기대에 있다고 여겨온 사람도 세월의 무게를 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지막이라는 다짐으로 여행에 필요한 열정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런 말은 어느 나이가 되면 누구나 몇 번씩은 사용하게 된다. 설사 드러내 말하지는 않더라고 마음속으로는 항상 간직하고 있는 상비약같은 것이다. 마지막이라는 다짐 속에는 힘들고 어려운 일도 견디게 하는 진통 효과가 포함돼 있다. 또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을 선물같은 특별한 시간으로 만들기도 한다.

살다 보면 마지막이라는 마음가짐에 익숙해지는 시기가 온다. 여행과 같이 어떤 장소를 방문하는 일뿐만 아니라 사람을 만나면서 이러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평생 지속될 것 같았던 친구와의 우정도 시간이 흐르면 그 바닥이 드러나는 때가 다가온다. 우정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정뿐만이 아니다. 시간에 훼손되지 않는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디에도 없다. 다시 찾아가지 못할 장소도 안타까운 대상이지만, 다시 만나기 힘들어진 사람도 삶에 아픔을 더하는 원인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외부의 대상에 의존하지 말고 자신과 대면하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을 가늠하게 된다. 특히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더욱 절실하게 체감한다. 삶뿐만 아니라 죽음도 자신의 생활 범위에 포함되는 가까운 사람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술자리를 함께 지키던 친구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모든 일이 새롭게 다가온다. 세상사의 움직임이 더 빨라지고 마지막이라는 마음속의 다짐이 현실감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나이 칠십 정도에 이르면 알게 모르게 마지막이 되어버린 일들이 점점 늘어난다. 지리산을 다시 오르지 못할 것이고 설악산 대청봉에서 단풍을 감상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운동장을 전속력으로 달리는 운동도 심장과 무릎이 허락하지 않는다. 역동하는 사회 현상에 참여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과 공감을 받는 역할도 남의 일이 되었다. 그래도 아무 일 없는 듯이 견디며 살아간다.

마지막이라는 마음가짐은 일상의 범위가 축소되는 상실의 정서와 연결돼 있다. 그래서 모든 세상사가 간절하고 절실한 일이 된다. 다시 마주하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나이 칠십이 되면 예사로 보아 넘길 일이 하나도 없다. 이러한 절실함은 젊은이들이 얻기 힘든 노년의 정신적 자산일 수도 있다. 이런 절실함으로 생의 마무리 단계에서 최고의 빛을 발한 예술가들을 떠올리며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김상곤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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