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내의 초록지문(17)]향기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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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내의 초록지문(17)]향기를 읽다
  • 경상일보
  • 승인 2025.05.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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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시내 나무의사·수필가

결혼 후 남산 어디쯤의 작은 빌라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 봄, 퇴근하는 남편을 마중하기 위해 현관문을 열면 축축한 저녁 공기와 함께 아까시나무 꽃내음이 따라왔다. 여느 변두리가 그렇듯 주변 풍경은 아름답지도 반짝이지도 않았지만, 아찔한 향에 취한 밤이면 초라한 반전세 빌라나 바닥을 보이던 통장 잔고도 잊을 수 있었다.

식물은 다양한 향을 통해 의사를 전달한다. 그러므로 냄새는 말이다. 이 언어는 휘발성이 강해 온도와 습도, 빛에 영향을 받아 퍼지는 정도가 다르다. 따뜻하고 빛이 좋은 날엔 멀리까지, 흐리고 습한 날엔 가까이에 머무는 식물의 향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향기는 일종의 초대장이다. 꽃은 번식기가 다가오면 내부의 분비세포에서 냄새 물질을 만든다. 지금 코끝을 스치는 이 달큼함은 식물이 바람과 햇살을 품어 기록한 속삭임이며 유혹이다. 그 의미를 알아차린 곤충들이 꽃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현재와 미래를 연결한다.

향기는 방어를 위한 신호다. 숲에서 마주하는 알싸하고 서늘한 향은 나무가 만들어내는 테르펜 계열의 휘발성 화합물이다. 이 중 피톤치드는 박테리아와 곰팡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방출되며, 인간에게도 심리적 안정, 항균 작용, 면역력 강화 등의 영향을 준다. 일부 식물은 자신을 위협하는 해충이 접근하면 그 해충의 천적을 유인하는 향으로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 아까시나무 꽃. 흔히 아카시아로 불리지만 ‘아까시나무’가 정확한 국명이다.
▲ 아까시나무 꽃. 흔히 아카시아로 불리지만 ‘아까시나무’가 정확한 국명이다.

향기는 때로 치열한 영역 다툼의 수단으로 이용된다. 소나무는 뿌리에서 칼로타닌이라는 타감물질을 방출해 다른 식물뿐 아니라 자신과 경쟁할 어린 소나무까지 살 수 없는 환경으로 만든다. 호두나무의 주글란, 은행나무의 징코라이드 역시 유사한 방법으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든다.

어떤 냄새는 감정과 추억을 동시에 불러온다. 인간의 오감 중에서 기억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감각이 후각인 덕분이다. 그래서일까. 바람결에 아까시나무꽃 향이 흩어지는 오월이 오면, 작은 빌라를 떠올린다. 과일 맛 사탕처럼 달았던 내 젊음의 한 장면이 스친다. 봄날 향기는 필독서다.

송시내 나무의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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