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시대에는 염포와 개운포를 통해서 해상무역의 창구역할을 하였고, 반도의 변방국가였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힘의 원천(철과 국제무역항)이 되었던 울산은 동해로부터 가파르게 솟아있는 무룡산 덕분에 그나마 왜구들에 의한 피해가 적었다. 하지만 고려 말인 공민왕 때에는 바다와 연해있는 태화강을 통해서 침략하는 왜구들 때문에 백성들과 관아가 극심한 피해를 당했는데, 행정을 보는 지방관이 경주에서 집무를 볼 정도였다. 그러다가 우왕과 공양왕 때 울산읍성(1385년)과 언양읍성(1390년)이 축조되면서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조선이 건국되고 염포가 있는 울산의 군사적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경상좌병영이 설치되었고, 1593년 8월에 경상좌도의 군무(軍務)를 담당하는 순찰사 한효순이 울산에서 인망이 높던 김태허를 임시군수로 임명하여 울산의 행정을 관장하게 하고 있었다.
임진란이 발발한 1592년 4월 21일 울산지역의 의병들은 박봉수를 대장으로 삼고 좌익장에 박응정, 우익장에 장희춘을 세우고 전응춘, 서인충, 이경연, 고자겸이 뜻을 같이하여 함월산의 기박산성에서 창의·거병하였다. 며칠 뒤인 5월5일에는 경주지역의 견천지와 유정 류백춘 등이 의병 500여 명을 이끌고 박봉수 진영에 찾아가서 격문을 전달하고 장기대결을 펼치며 왜군과의 결전에 대한 의지를 다졌었다.
이틀 뒤인 5월7일 이들은 삼경 무렵에 병영성을 공격하기 위해서 은밀히 움직였다. 의병군을 4개로 나누어 동서남북 4문(門)에 매복시킨 후에 북을 치며 함성을 지르고 적을 치니, 성내에 있던 수천의 왜병들이 놀라서 군기(軍旗)와 총통을 버리고 달아났다. 성문 밖에 매복해 있던 의병군은 불시에 이들을 공격해서 수백에 달하는 적의 수급을 베고 창검과 군량을 노획하여 기박산성으로 돌아갔다. 병영성 기습작전은 울산지역에서 활동했던 의병들이 왜적들과 치룬 최초의 전투였다.
좌병사 이각이 병영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바람에 싸워보지도 못하고 울산지역을 왜적들에게 내준 것에 분개하여, 제일 먼저 골짜기를 찾아다니며 숨어있던 장정 3천명을 모아서 의병결사대를 조직하고, 수많은 고을들을 차례로 수복한 사람은 서인충이었다. 서인충의 자는 망보, 호는 망조당으로 본관이 달성인 달성서가다. 1591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이듬해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형인 서몽호와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주사장(舟師將)이 되어 울산가군수 김태허를 도와 수전과 육전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또한 5월에는 강동의 공암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6월에 있었던 문천회맹에서 공을 세워 1593년 1월에 어모장군 훈련원정으로 제수되었으며, 이후에도 1593년 2월의 태화강 전투, 4월에는 이견대 전투에서 각각 전공을 세웠다.
글 : 지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