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우리는 ‘지식이 힘이다’라고 믿었다. 교육을 통해 계층이동이 가능했고, 전문성과 도덕성이 사회를 이끄는 기준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면, 그 믿음은 점점 허상이 돼가고 있다. 지식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성찰과 탐구의 수단이 아니라, 권력과 자본을 획득하기 위한 기능적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 정치도, 경제도, 교육도 점점 더 돈이 힘이고 권력이 진실이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지식은 그저 자본과 권력에 봉사하는 수단으로 전락해가고 있다.
정치영역에서 지식의 퇴조는 특히 두드러진다. 과거에는 정책 전문가의 의견이 존중받고, 학자들의 분석이 여론 형성에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최근의 정치 담론은 감정 동원과 이미지 소비에 훨씬 더 집중돼 있다. 논리와 사실보다는 누가 말했는가가 더 중요하고, 공공의 장에서 정책은 사라지고 혐오와 갈등이 대체하고 있다. 정제된 지식은 긴 호흡의 설명이 필요하고, 반응 속도가 느리다. 반면 자극적인 언설은 즉각적 반응과 클릭 수를 보장한다. 결국 공론장은 점점 더 얄팍해지고, 정치의 설득력은 줄어든다. 선거는 정책 경쟁이 아니라 감정 동원의 장으로 바뀌었고, 정책자문단은 존재하되, 활용되지 않는다.
선거철이면 학자들이 양 진영으로 갈려 줄서기에 바쁘고, 당선 이후엔 공공기관과 위원회에 낙하산처럼 착륙한다. 진영 논리의 첨병이 되고, 학자는 더 이상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줄서는 존재가 된다. 학문적 진실보다 정치적 안배가 앞서는 풍경은 이제 낯설지도 않다. 그 책임에서 지식인은 자유롭지 않다. 일부는 권력의 테두리 안에서 혜택을 누리며 입을 다물었고, 일부는 연구실을 벗어나 대중영합에 나섰다. 학자는 정책을 감시하기보다, 정책의 수혜자가 되길 원했고, 연구는 공공적 탐구가 아니라 정치적 청구서의 형태로 바뀌었다. 누가 봐도 부끄러운 현실인데도 동료 학자들은 침묵하고 눈을 감는다. 지식인이 자기를 감시하지 않는다면, 누가 감시할 것인가?
경제 영역에서도 지식의 위상은 과거와 다르다. 고학력자가 비정규직을 전전하고, 석·박사 학위자가 플랫폼 노동에 종사하는 일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반면 부동산, 주식, 가상자산 등 자본 기반의 수익은 노력이나 노동과 무관하게 축적되고 있다. 지식과 노동의 가치가 자산의 위력에 밀리는 사회, 노력보다는 출발선의 차이가 미래를 결정짓는 구조가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이 무너지고, 출발선의 자산이 미래를 결정한다. 지식은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 효율적 수익 창출을 위한 포장재로 소비된다. 이는 단지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넘어, 개인의 삶에 대한 기대와 사회 전반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심각한 구조적 위험 요인이다.

교육과 연구 생태계도 예외는 아니다. 대학은 학령인구 감소와 재정 압박에 시달리며 점점 더 기업처럼 운영되고 있다. 연구자는 논문 수와 실적 중심의 평가에 매몰되고, 장기적 탐구보다 단기성과 중심의 과제가 우선시된다. 정부의 R&D 예산 구조조정도 같은 흐름이다. 기초과학이나 인문사회 분야는 투자 대비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뒤로 밀리고, 장기 프로젝트보다는 즉각 성과를 내는 과제에 자원이 집중된다. 지식의 자율성과 공공성은 점점 후퇴하고, 지식인은 체제 유지의 기술자로 전락해간다. 연구자는 실적의 노예가 되고, 연구윤리는 편의적으로 해석된다. 더 우려스러운 건, 이러한 시스템을 상아탑 내부에서 바꾸려는 목소리가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현상은 단순한 일시적 변화가 아니다. 지식의 침묵은 곧 공론장의 약화를 뜻하며, 민주주의의 기반을 흔드는 일이다. 사실과 논리는 소음에 파묻히고, 사회적 결정은 자본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손에 좌우된다. 정보는 넘치지만, 그 정보의 신뢰성과 정합성은 의심받는다. 지식이 언론에서 설 자리를 잃고, SNS 알고리즘이 여론을 형성하며, 대중은 정보 소비자는 될 수 있어도 비판적 사고의 주체로 서기 어렵다. 그 결과,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세계에서 정책은 왜곡되고, 시민의 신뢰는 급속히 무너진다.
이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식은 왜 더 이상 중심에 있지 못하는가. 단지 시대의 흐름 때문일까. 아니면 사회가 지식에 기대야 할 이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일까. 지식이 설득력을 잃는 사회는, 곧 합리성의 기반이 약해진 사회다. 이는 민주주의의 위기일 뿐 아니라, 혁신과 성장의 기반도 흔들리게 만든다. 그러나 이대로 흘러가도 괜찮은가. 지식이 권력의 하위 개념으로 기능하는 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지식은 단지 정보를 축적하는 기능을 넘어, 사회를 성찰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며 공공의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해법은 분명하다. 지식의 공공적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정부는 연구자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장기적 관점의 R&D 투자를 지속해야 한다. 대학은 입시경쟁 기관이 아닌, 탐구와 비판, 상상력의 공간으로 회복돼야 한다. 기업은 단기 수익만이 아니라, 지식생산과 인재양성을 미래 생존전략으로 인식해야 한다. 정치권은 지식을 장식으로 소비하지 말고, 사회적 논의의 파트너로 존중해야 한다. 언론은 자극적 콘텐츠보다 사실에 기반한 지식 전달자로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무엇보다, 사회 전체가 지식의 역할에 대해 다시금 성찰해야 한다. 지식은 단순한 정보나 실적이 아니라,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묻고 답하는 과정이다. 자본이 말하고 지식이 침묵하는 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지식이 다시 말해야 한다. 침묵이 길어지면 사회는 오해와 왜곡 속에서 길을 잃는다. 그 출발점은 지식에 대한 사회적 신뢰와 존중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지식인들은 다시 미래를 논할 자격을 갖게 될 것이다.
윤동열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한국생산성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