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는 이웃 도시 대구 출신으로, 울산을 외지인의 시선으로 바라볼 기회가 많았다. 외지인의 시각에서 보면 울산은 매력있는 도시다. 고소득 대기업 생산직 근로자가 많아 중산층이 두텁고, 1인당 GRDP는 전국 최고 수준이다. 도시는 슬럼화된 곳 없이 정돈돼 있고, 공원과 체육시설 등 기본적인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으며, 주택보급률과 자가보유율이 높아 주거여건도 양호하다.
하지만 정작 울산 시민들의 체감은 다소 엇갈린다. 2012년부터 팬데믹 직전까지 이어진 긴 침체의 기억, 청년층과 여성 인구의 유출,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울산경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키웠을 것이다.
울산경제의 미래에 대한 전문가들의 전망도 양극단에 놓여 있다. 한편에서는 조선, 자동차, 석유화학 등 주력 산업의 부침과 함께 울산경제가 구조적 정체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진단이 나오고, 다른 한편에서는 현대차, HD현대중공업 등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들을 가리키며 울산의 잠재력을 여전히 높이 평가한다.
비관과 낙관이 공존하는 가운데, 양측 모두가 동의하는 지점도 있다. 바로 주력 산업의 고도화와 신산업 육성을 통한 울산경제의 체질개선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점이다. 더욱이 미국의 관세 정책으로 상징되는 글로벌 보호무역주의의 확산과 지정학적 분절화(geo-economic fragmentation), 그리고 기후변화와 같은 구조적 도전들은 수출과 중화학공업에 기반한 울산경제가 더는 과거의 성공공식을 유지하기 어려움을 시사한다.
이러한 전환점에서 울산경제가 마주한 현실적인 돌파구는 AI를 통한 제조업 혁신이다. 중국 등 경쟁국의 빠른 추격 속에서 10년 뒤에도 울산의 제조업이 지금과 같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특히 중국과 중동 국가의 설비 확장으로 글로벌 공급과잉에 직면한 석유화학 산업의 위기는 이를 방증한다. 따라서 AI와 디지털 전환이라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제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일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다.

흥미롭게도, 과거 울산에서 중화학공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과 지금의 제조업 AI가 울산에서 뿌리내릴 수 있는 조건들이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첫째, 과감한 민간 투자다. 정주영, 최종현 등 불세출의 기업인들이 높은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선제적 투자를 통해 산업화를 이끌었던 것처럼, 최근에는 SK와 아마존이 7조원 규모의 국내 최대 AI 데이터센터 건립 계획을 발표하는 등 울산의 AI 산업에도 과감한 투자가 본격화되고 있다.
둘째, 정부의 강력한 지원이다. 정부는 1962년 울산공업지구 지정 이후 국가 산업화의 핵심 기지로서 울산의 역할을 강조하며 집중적인 인프라, 자금 및 제도적 지원을 제공했다. 오늘날에도 정부는 AI 인프라 고속도로 구축을 주요 정책으로 삼고 있으며, 권역별 AI 인프라 거점 조성을 위해 과감한 세제 혜택과 규제혁신에 나서고 있다. 울산시에서도 분산에너지 특화지역 지정 추진, 신속한 인허가 등 기민한 행정 지원을 통해 기업 투자를 뒷받침하고 있다.
셋째, 우수한 산업입지와 제조업 경로의존성이다. 과거 울산은 공업용지, 공업용수, 항만·철도 등 모든 조건이 제조업에 최적화돼 있는 산업입지의 강점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유류 비축기지가 산업화의 필수조건인 석유정제 산업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이는 다시 부산물인 석유화학 공단 육성, 그리고 이를 소재로 이용하는 중공업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등 산업입지의 경로의존성도 울산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오늘날 울산 역시 전력, 냉각, 데이터 전송 등 AI 인프라 측면에서 탁월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60년에 걸쳐 쌓여온 제조업의 깊이도 경로의존성을 통해 울산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울산은 방대한 제조 데이터와 숙련 인력의 암묵지를 갖추고 있으며, 이는 AI 학습의 핵심 자산이다. 제조업 AI는 알고리즘 개발뿐 아니라, 실증과 피드백이 반복되는 순환구조가 필수적인데, 울산은 AI 전문가와 현장 기술자 간의 협업이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는 최적의 실증 환경을 제공한다.
물론 AI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려면 새로운 전략도 요구된다. 대표적인 것이 유기적인 산학협력이다.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전략을 넘어 독자적인 기술 축적을 통해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도약해야 하는 울산의 입장에서 연구개발 강화는 필수적이다. 특히 울산의 강점인 제조 데이터와 실증환경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울산의 제조업 현장과 기업·대학의 연구기능이 유기적으로 작동해 시너지 효과를 제고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UNIST는 AI대학원을 설립하고 산학협력과 실무형 인재 양성에 적극 나서고 있고, 울산대학교와 울산과학대학교도 ‘지역혁신중심대학지원체계(RISE)’ 사업을 통해 지역 수요 맞춤형 인재 양성체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이는 AI 산업 생태계 형성에 긍정적인 신호로 볼 수 있다.
또한 문화, 유통 등 정주여건의 개선도 AI 생태계 조성의 핵심이다. 과거 ‘천안분계선’이 ‘판교분계선’으로 북상한 지금, 인재와 혁신기업의 유치는 삶의 질과 직결된다. 다행히 울산은 반구천 암각화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2028년 국제정원박람회 유치, 삼산매립지 공연장 건립 등 문화 인프라 확충에 나서고 있으며, 수소트램, 부울경 광역철도 등 교통 인프라도 빠르게 개선되고 있다.
위기 속의 혁신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울산은 과거 수많은 위기와 변화 속에서도 늘 혁신과 적응으로 해법을 찾아왔다. 지금도 산업현장의 땀방울, 기업의 도전정신, 지역사회의 의지가 모여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다가오는 전환기를 기회로 바꿔, 울산이 다시 한 번 대한민국 산업발전의 심장으로 도약하기를 기대한다.
최정태 한국은행 울산본부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