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광복, 잃어버린 운명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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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광복, 잃어버린 운명을 찾다
  • 경상일보
  • 승인 2025.08.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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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 김진명리학회 회장

새벽을 여는 바람은 아직도 1945년 8월15일 정오에 울렸던 전파를 알리고 있다. 일본의 항복 선언이 라디오를 타고 조선의 하늘 아래로 퍼졌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울고, 함께 손을 잡으며 감격을 나누었다. 누군가는 이름을 되찾았고, 누군가는 헤어진 가족의 빈자리를 떠올렸다. ‘나라의 빛이 돌아온 날’이다. 광복은 정치적 독립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인간 존엄의 회복이며, 우리 전체가 외세의 강압 아래 있었던 오랜 시간에서 깨어나는 정신적 반란이었다. 자유는 저절로 주어지진 않는다. 그것은 피를 흘리고 죽음 위에서 비로소 싹을 틔운다. 3·1운동으로 분출된 민중의 소리,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 자주권의 꿈, 무장투쟁과 문화운동, 그리고 무명으로 쓰러져간 수많은 사람의 ‘행동하는 믿음’이 있었다. 광복은 그 모든 결합의 산물이다. 무수한 질문 끝에 맺힌 하나의 대답이었다.

일제강점기에서 우리는 집단적으로 ‘존재의 경계’에 몰렸고, 이름도 언어도 감정도 생각도 제 것으로 간주 받지 못했다. 인간이 타인의 도구로 전락했을 때, 철학은 말한다. ‘인간은 목적 그 자체여야 한다’는 칸트의 이 명제는 식민지 현실에서 정면으로 파괴되었다. 해방은 국토의 회복이자 존재의 구제였고, 억압을 뒤엎은 민족적 운명의 반전이었다. 하지만 운명이란 반전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순간부터 새롭게 써 내려가야 한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탄생성(natality)’을 ‘새 출발의 능력’으로 해석하였다. 사람은 죽기 위해 태어나는 존재가 아니라, 시작하기 위해 태어나는 존재라는 것이다. 매년 돌아오는 광복절은 과거의 기념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묻는 현재형의 분기점이다.

백범 김구는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라고 했다. 그 아름다움은 권력이나 부유함이 아니라 한마디로 ‘사람을 귀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되며 문화라고 덧붙였다. 광복은 바로 그러한 사상에서 시작하는 철학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광복절을 보내는 우리의 자세는 어딘가 동떨어진 느낌이다. 국경일인 ‘나라를 되찾은 날’이 어떤 의미였는지 사유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듯하다. 전쟁과 식민의 경험이 사라진 세대가 늘고, 애국과 헌신이란 말이 낡은 언어처럼 들릴 때, 광복이란 의미는 점점 축소되고 만다. 아렌트의 말처럼 시작의 기적은 행동이 뒤따를 때만 현실이 되는 것이다.

기념일은 어제가 아니라 내일을 구상한다는 것이다. 태극기를 달고 경축식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지난 반세기의 피와 눈물을 되새기며 내일을 설계해야 한다. 기억은 파묻는 의식이 아니라 비판적 재해석이어야 하며, 그 재해석은 상상력과 용기를 먹고 자란다. 여기서 철학과 역사는 조화를 이룬다. 칸트가 말한 ‘목적 그 자체’는 형식 용어가 아니라 구체적 인간의 얼굴이며, 아렌트가 주장한 ‘탄생의 기적’은 우리가 매일 맞이하는 아침이다. 김구가 갈망한 ‘문화의 힘’은 책 한 권, 대화 한 줄, 낯선 이를 위한 배려 한 번으로도 증명된다. 광복은 해마다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지금 어디까지 도달했는가?”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가? 경제는 성장해 왔지만 모두 불안정한 시대로 느낀다. 혐오적인 말들이 가깝게 들리고, 진실보다 편견이 커지고 있다. 자본은 순환하고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고립되고 있다. 해방은 이루어졌지만, 삶은 아직도 ‘해방되지 않은 방식’으로 굴러간다. 광복 이후의 시간이 또 다른 억압의 구조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광복절을 소중하게 여기고 기념해야 하는 이유이다.

역사는 단지 과거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방향을 비추는 거울이어야 한다. 광복절은 거울이 유난히 선명한 날이다. 국권 회복은 물론 자유를 향한 지극히 고통스럽고도 위대한 여정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 여정은 오늘도 우리 앞에 있다. 어떤 나라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 그리고 어떤 책임을 감당할 것인지 등이다. 그 모든 질문은 결국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으로 수렴된다. 광복은 다시 사람을 가운데에 두는 일이다. 정치도 아니고 경제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다. 존재의 중심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이날의 본질적 의미이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하루가 역사라는 강물에 던져지는 조약돌이다. 흔적은 작아도, 방향을 바꾸는 물결은 언제나 거기서 시작된다.

김진 김진명리학회 회장

※외부원고는 본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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