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월20일, HD현대건설기계가 불법 파견 문제로 법적 다툼을 이어오던 사내 협력사 서진이엔지 노동자들과 5년 만에 합의에 도달하며 분쟁을 마무리했다. 이번 합의로 서진이엔지 노동자들은 내년 1월부터 HD현대건설기계의 정규직 근로자로 일하게 된다. 뜻밖의 낭보에 울산 지역사회는 환영과 응원의 목소리를 보내고 있다.
불법 파견 문제는 2020년 8월 HD현대건설기계 울산공장 내 굴착기 붐(Boom), 암(Arm) 가공 공정 중 용접과 검사 등을 담당하던 서진이엔지가 경영 악화로 폐업하면서 불거졌다. 서진이엔지 근로자들은 HD현대건설기계로부터 지휘·감독을 받아왔기 때문에 원청이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2021년 3월 원청의 직원임을 인정해달라는 취지로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HD현대건설기계와 서진이엔지 노동자들은 1심과 2심 판결을 거치며 5년을 소요했다. 소송 전 합의가 이뤄졌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은 첨예하게 대립하는 쟁점이었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과정이었다.
이번 합의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HD현대건설기계가 법원의 판결에 수동적으로 의존하던 태도에서 능동적 태도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단순히 판결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고 대화와 소통을 택했다. 이는 기업이 노사관계를 단순한 법적 문제를 넘어 지속 가능한 협력 관계의 기반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HD현대건설기계는 올해 창사 40주년을 맞이했으나, 글로벌 경기 불황과 철강 관세 등으로 전례 없는 불확실성에 직면해 있다. 또한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 HD현대인프라코어와 합병을 추진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번 합의는 위기 극복과 재도약을 위한 합리적이고 협력적인 노사관계의 출발점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합의의 가치는 성공적인 이행 없이는 무의미하다. 합의 내용을 명확히 하고, 기한을 철저히 지키며, 투명하게 소통해야 한다. 모호한 부분은 불신을 낳고, 지연은 신뢰를 무너뜨린다. 특히 장기 합의의 경우 주기적인 점검과 공유가 필요하다. 신뢰는 유리그릇처럼 쉽게 깨지기에,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진정성 있는 실천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번 HD현대건설기계와 서진이엔지의 사례처럼, 합의는 단순히 분쟁을 끝내는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법정 다툼이라는 제로섬 방식을 넘어, 서로가 감내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는 지혜이자 책임 있는 선택이다. 동시에 합의는 갈등을 소모적으로 확대하기보다 건설적으로 수습하고, 나아가 관계의 미래까지 고려한다는 점에서 여러 측면에서 현실적이고 바람직한 대안이라 할 수 있다.
소송이 수개월에서 수년의 시간과 비용을 요구하는 데 비해, 합의는 짧은 시간 안에 경제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 판결이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반면, 합의는 당사자가 직접 조건을 정할 수 있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무엇보다 합의는 관계를 끊어내기보다 이어가는 선택이다. 소송이 감정을 악화시키고 갈등을 깊게 만들 수 있지만, 합의는 상호 양보 속에서 협력의 가능성을 남긴다. 판결은 불복으로 이어질 수 있으나 합의는 자발적 이행을 이끌어내고, 갈등의 소모를 줄여 심리적 부담까지 덜어준다.
‘나쁜 합의라도 좋은 소송보다 낫다’라는 서구의 법언처럼, 합의는 법원의 판결과는 다른 차원에서 미래지향적 관계의 가능성을 연다.
이번 합의가 단순한 분쟁 종결을 넘어 HD현대건설기계와 서진이엔지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산업계 전반에 상생과 협력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나아가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산업계가 더욱 성숙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회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김해룡 울산대 경영·공공정책대학 경영경제융합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