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9월, 한국의 노사관계는 새로운 분기점에 서 있다. 지난 9월 2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노조법 2·3조 개정안, 이른바 노란봉투법은 내년 3월 본격 시행을 앞두고 있다. 노동계는 투쟁의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는 점에서 이를 역사적 성과로 평가하지만, 경영계는 경영 불확실성과 기업 부담의 가중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우려를 표출한다. 이미 제조업 현장에서는 추투(秋鬪)의 기운이 감돌며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법 시행이 단순한 절차적 변화에 그치지 않고, 노사관계의 권력 구조와 교섭 틀 자체를 바꾸는 변곡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 경제 전반에 미칠 파장은 결코 작지 않다.
가장 먼저 긴장을 드러낸 것은 자동차와 조선, 철강 같은 제조업 주력 산업이다. 현대자동차와 HD현대중공업 노조가 9년 만에 동시에 부분 파업에 돌입했고, 울산공장에서는 하루 약 1500대 차량의 생산 차질이 발생했다. 단순한 임금·성과급 문제가 아니라, 법 시행을 앞둔 원하청 교섭 구조 변화와 맞물려 전초전 성격을 띤다. 노란봉투법은 원청의 사용자 책임을 확대하고 하청노조의 교섭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려는 취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경영계는 이를 무한 책임으로 해석할 여지가 크다고 지적한다. 만약 이런 법적 불확실성이 현실화된다면, 한국 수출의 근간을 이루는 주력 산업의 국제 경쟁력에 치명적 영향을 줄 수 있다. 기업들이 단순히 파업 리스크 관리에 머물 것이 아니라, 산업별 교섭체계 개편, 원하청 상생 모델 구축, 그리고 노사정 대화 참여 같은 전략적 대응을 병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 이유다.
정부 역시 이 문제를 단순히 법 시행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파급 효과까지 고려해 절충안 마련에 나섰다. 핵심은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면서도 기업이 감당할 수 있는 제도적 균형을 만드는 것이다. 판례와 기존 사례를 기초로 불필요한 소송을 줄이고 분쟁 예방형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방안이 우선 검토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기업이 있어야 노동자도 존재할 수 있다”며 교각살우를 경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교섭창구 단일화 문제는 노란봉투법 후속 논의에서 가장 첨예한 쟁점으로 떠올랐다. 현재 복수노조가 있는 경우 교섭대표노조를 단일화해야 하는데, 이는 하청노조가 원청과 직접 교섭할 수 있는 권리를 실질적으로 제약해 왔다. 노동계는 제도의 전면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고, 경영계는 교섭 다원화로 인해 현장 혼란이 가중될 것을 우려한다. 노동부가 대안으로 검토하는 의제별 교섭창구 운영은 임금, 안전, 복지 등 사안별로 다른 교섭단을 두는 방식이다. 이는 하청노조의 교섭권을 보장하면서도 기업 부담을 완화하려는 절충적 시도다. 하지만 교섭 절차가 복잡해지고 노조 간 갈등이 발생하며 비용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교섭창구 논의는 단순히 교섭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원하청 관계 재편과 산업별 노사관계 구조 개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근본적 과제다.
정치권의 움직임도 주목된다. 여당은 최근 주요 경제단체장들과 회동하며 노란봉투법·상법 후속조치와 함께 경제형벌 완화를 약속했다. 이는 경영계의 불안을 진정시키고 법 시행 충격을 최소화하려는 정치적 신호로 해석된다. 결국 여당의 약속은 단순한 친기업 행보라기보다 사회적 대화 과정에서 경영계의 참여를 끌어내려는 정치적 균형 전략이라 볼 수 있다.
이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양대 노총 위원장을 만난 것도 중요한 전환점이다. 대통령은 법 제정 과정에서 노동계에 약속한 내용을 지켰고, 이를 바탕으로 직접 소통에 나섰다. 이는 노동계의 법적 정년 연장, 주 4.5일제, 특수고용 보호 요구와 정부의 충격 완화 및 사회적 대화 복원 의지가 맞부딪히는 자리였다. 대통령이 직접 노동계와 신뢰를 구축하려는 행보는 사회적 대타협의 필요성을 확인하는 신호이다. 그러나 경영계는 정부가 노동계에 지나치게 기운 것 아니냐는 우려를 표한다. 정부가 중재자로서의 균형을 얼마나 잘 유지하느냐가 향후 노사정 협력의 성패를 가를 것이다.
특히 법적 정년 연장과 주 4.5일제 논의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노동계는 저출산과 고령화 상황에서 정년을 65세까지 늘리고, 근로시간을 줄여 삶의 질을 높이며, 성과를 공유하자고 주장한다. 정부 역시 청년 고용과의 균형을 고민하면서도 고령자 고용 연장에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경영계는 인건비 부담, 인사 적체, 생산성 저하를 우려한다. 따라서 정년 연장은 직무·성과형 임금체계 개편, 세대 간 고용 연계 프로그램, 노사 공동의 생산성 제고 방안과 병행되어야 한다. 단순히 정년만 연장할 경우 청년 고용 위축이라는 부작용이 불가피하다.
민주노총이 26년 만에 사회적 대화에 복귀하겠다는 것도 큰 의미를 갖는다. 민주노총은 국회 주도의 대화 참여를 결정하며 산별교섭 제도화, 특수고용·플랫폼노동자 권리 보장, 정년 연장, 작업중지권 실질화 등을 핵심 의제로 제시했다. 이는 투쟁 일변도의 한계를 인식하고 제도 참여를 통해 성과를 얻으려는 전략적 선택이다. 만약 사회적 대화의 복원이 성공한다면, 노란봉투법 시행, 정년 연장, 근로시간 개편 같은 중대 현안을 합의의 틀 속에서 다룰 수 있다. 이는 한국 노사관계가 대립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협력의 선순환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한다.
지금 한국은 불확실성과 기회의 갈림길에 서 있다. 정부와 정치권은 균형 잡힌 제도 설계를 통해 혼란을 최소화해야 하고, 노동계는 책임 있는 대화와 양보로 사회적 신뢰를 회복해야 하며, 경영계는 단기적 부담을 넘어서 장기적 협력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 노란봉투법은 갈등의 불씨이자 동시에 대화의 기회다. 이번 전환기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한국은 투쟁적 노사관계의 악순환을 반복할 수도, 혹은 사회적 대타협을 통한 협력적 모델로 도약할 수도 있다. 대립을 넘어 대화로 가는 길만이 한국 노동시장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것이다.
윤동열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한국생산성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