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얘는 아직 진로도 모르는데 벌써 과목을 고르라고 하네요” “어떤 과목이 입시에 유리한지조차 잘 모르겠어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거나 막 진학한 자녀를 둔 부모들이 가장 자주 하는 말이다.
2025년 전국 모든 고등학교에서 고교학점제가 전면 시행되면서, 이제 학생들은 대학처럼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 이수하고, 3년간 총 192학점 이상을 취득해야 졸업할 수 있게 됐다. 과목마다 난이도와 성격이 달라졌고, 학생의 진로에 따라 어떤 과목을 선택하느냐가 중요해졌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주요 대학들은 이미 ‘고교 선택 과목과 전공의 적합성’을 입시에 반영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아직 자신의 진로를 확신하지 못한 채, ‘과목 선택’이라는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있다. 여기에다 어떤 과목이 어떤 진로와 연결되는지, 입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정확히 알기 어렵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새롭게 바뀐 제도와 용어, 시스템을 따라가기 버겁고, 무엇이 ‘도움이 되는 선택’인지 헷갈리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 속에서 부모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첫째, 자녀와 ‘진로 대화’부터 시작해보자. 진로를 모른다고 해서 손을 놓을 수는 없다. 과목 선택의 시작은 아이의 흥미와 강점 파악이다. “요즘 어떤 과목이 재미있어?” “어떤 일이 멋있어 보이니?” “수학이 편해? 사회가 편해?” 이처럼 큰 틀에서 관심 분야를 좁혀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 확신은 없어도, 관심의 방향은 분명 존재한다. 부모가 대화를 통해 그 방향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가장 첫걸음이다.
둘째, 과목과 진학의 연결고리를 이해해야 한다. 예전에는 좋은 성적만 받으면 대학 진학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무엇을 배웠는가’도 평가 요소가 된다. 예를 들어 의대나 이공계열을 희망한다면, ‘과학Ⅱ’ 과목이나 ‘미적분’ ‘기하’, 반대로 인문계열은 ‘정치와 법’ ‘경제’ ‘사회문제 탐구’ 등 인문·사회 중심 과목을 선택해야 전공 적합성이 높게 평가된다. 쉬운 과목만 선택하거나 친구를 따라 선택하다 보면, 아이의 진로와 맞지 않는 과목만 이수하게 될 수도 있다.
셋째, 학교 밖 수업 정보도 챙겨야 한다. 모든 과목이 모든 학교에 개설되는 건 아니다. 이럴 땐 공동교육과정이나 온라인 강의 플랫폼을 활용해야 한다. 이런 정보는 아이 혼자 챙기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부모가 함께 확인하고 안내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넷째, 상담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 고등학생은 연 1~2회 이상 학교에서 진로 상담을 받게 되어 있다. 이때 부모도 함께 참여하거나, 상담 전 자녀와 충분히 대화해 상담 준비를 시켜주는 것이 좋다. 학교에 자녀의 고민이나 희망 진로를 미리 알려주면, 보다 맞춤형 상담이 가능해지고,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부모도 계속 배우고 준비해야 한다. 많은 부모들이 고교학점제를 ‘복잡하고 어렵다’고 느낀다. 실제 한 교육청 조사에 따르면 학부모의 고교학점제 이해도는 평균 58점에 그쳤고, 절반 이상이 “정보가 부족하다”고 답했다. 교육청이나 학교에서 제공하는 설명회, 연수, 자료 등을 활용해 꾸준히 학습해야 아이의 선택을 지지할 수 있다.
부모의 역할은 ‘대신 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아이에게 과목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 만큼, 실패도 배움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부모가 할 일은 대신 결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도록 신뢰와 정보를 함께 제공하는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옆에서 지켜봐 주는 것, 혼란스러울 때 방향을 함께 고민해 주는 것, 그렇게 아이는 조금씩 자기주도적인 학습자로 자라난다.
진로를 몰라도 괜찮다. 지금은 아이의 가능성을 믿고,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시기다. 고교학점제는 그 시작일 뿐이다. 아이의 길은 아이가 만들지만, 그 옆을 함께 걷는 부모가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아이는 충분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정은혜 한국지역사회맞춤교육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