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울산 최대 마루지는 경상좌병영이다. 울산 병영은 조선 초기 왜구 때문에 설치됐지만, 고려 현종 때 여진족의 해상 침입을 막기 위해 방어사를 파견한 사실을 감안하면 1000년의 전통을 자랑한다. 병영성은 성곽도시 울산의 많은 성 중 규모나 위상 모두에서 으뜸인 곳이다. 그 옛날 빌딩들이 없었을 때는 남으로 장생포와 염포를 조망하고 북으로는 관문성을 올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성체는 그렇게 높지 않지만 주변은 더 평탄한 곳이고 태화강 하구 바닷가에서 가까워 사방 조망이 가능하다. 성에는 본영 수천의 병사가 주둔하였고, 시대에 따라 적게는 400호, 많게는 1000호에 가까운 민호를 안팎으로 끌어안을 수 있었다.
수백 명의 장수들이 병영을 거쳤다. 그중 세종 때 김종서와 함께 6진을 개척한 양산 출신 이징옥이 눈에 띈다. 그는 세종 21년 여진족 방어와 마찬가지로 왜구 방비가 중요하니 남방 연해 젊은이들을 북방으로 보내지 말자는 비변책을 올렸다. 좌병영의 명예는 임진왜란 때 실추됐다. 임란 발발 직후 갓 부임한 좌병사 이각의 비겁한 처신이 문제였다. 하지만 정유재란을 거치며 지역 의병들이 대활약하면서 울산의 명예를 회복했다. 선조 32년(1599)에는 도호부로 승격했다. 평양성 전투와 도산성 전투의 영웅이었던 김응서 장군과 홍의장군 곽재우가 차례로 부사를 겸해 지냈다. 이후 병영은 다시 활기를 찾았으며, 다양한 직역을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 살았다. <여지도서: 경상도 좌도병마절도영> 등에 울산병영의 기록이 일부 남아있는 것이 다행스럽다. 그리고 조선시대 호적들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병영, 당시 내상면(하상면)을 중심으로 한 울산의 호적은 서울대 규장각에 상당한 분량이 남아있다.
무엇보다 병영은 외솔 최현배 선생을 낳은 곳이다. 외솔의 펜은 좌병사의 칼보다 강했다. 병영1동 행정복지센터 뜰에 모인 좌병사들의 선정비에 적힌 공적들은 진위를 확인하고 평가할 길이 없지만, 외솔기념관에 전시된 선생의 업적은 실제 공적의 극히 일부만을 보여주는 데 그치고 있다. 독립에 있어서는 박상진 의사와 동급의 훈장을 받았지만, 외솔은 독립 후의 업적이 더해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선생은 병영에서 자라며 조선이 부족했던 점을 체험하고 반성했다. 서울로 유학을 가서 한글을 배우며 독립운동의 방향을 정했고, 일본에서 세계를 접하며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1926년 동아일보에 발표된 《조선민족갱생의 도》는 《백범일지》보다 이른 시기에 한글의 힘, 문화의 힘을 강조한 글이다. 아울러 기술과 과학, 교육과 자립경제를 갱생의 근본이라 하였으니 울산공업센터 취지와 일맥상통한다. 박정희 대통령도 이 책을 탐독하고 후일 《우리민족의 나아갈 길》을 쓰지 않았을까? 한편으로 선생은 나라를 위해 일하면서도 고향인 울산 병영을 사랑하며 자주 찾았고, 물심양면으로 지역을 도운 분이다. 울산의 자연과 인문을 멋들어지게 소개한 <울산풍물>을 지었고, <삼일사 노래>와 <삼일충혼비문> 등 중요한 글을 지역에 남겼다. 아쉽게도 병영이 만들던 흑각궁과 조총은 사라지고, 은장도마저 명맥이 위태롭지만 외솔기념관과 한글도시 중구는 세계적으로 점점 더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병영은 국제도시 울산의 상징이기도 했다. 혼일강리도 등 여러 세계지도에 좌병영이 크게 표시됐다. 경주를 지난 대일 통신사와 수신사는 병영을 거쳐서 동래로 향했다. 지금 통신사 한일 우정걷기 코스도 마찬가지다. 울산 개신교는 호주 장로교회가 중심이 되어 1895년 병영교회에서 시작해 언양으로 확장되어갔다. 당시 병영은 울산에서 가장 번화하고 개방적인 공간이었다. 그러나 구한말 이후 근대화가 진행되며 군사적 용도의 병영은 해체됐다. 병영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체오헌과 선위각 등 공관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고, 하마비만 외로이 옛 진해루 밖을 지키고 있다. 승리 깃발인 둑기(纛旗)를 모신 북문지 인근 둑당도 보이지 않고 근처엔 마을 제당만 자그맣게 생겨나 있다. 100여년 세월을 기다려 울산 병영성은 이제 부활을 시도하고 있다. 올해까지 북문 성체 정비가 완료되며, 동문 성체는 마무리 중이다. 서문지는 문루 복원에 착수했으며, 지난해 조선 초기 남문지로 추정되는 귀중한 유적이 발굴됐다. 그 옛날 병영시설과 저잣거리가 어울렸듯이, 미래의 병영은 맛집과 카페가 풍성하게 어울리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발전해 갔으면 한다.
김상육 울산 중구 부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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