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 늦은 저녁을 먹고서 둘은 산 아래에 있는 계곡으로 갔다. 계곡물은 더위를 한 방에 날려줄 만큼 시원했다. 국화는 멱을 감기 위해서 천동에게 좀 떨어진 곳에 있으라고 했다. 천동은 누이를 골려줄 심산으로 아예 그녀가 안 보이는 곳에 숨어버렸다. 잠시 멱을 감던 국화는 산속에서 들리는 이상한 짐승 소리에 두려워서 동생을 찾았다. 갈가지(범의 새끼)가 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살쾡이가 내는 소리 같기도 한 짐승의 소리가 계속 들리자, 그녀는 천동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천동은 기척도 없었고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동생!”
“천동아!”
갑자기 깊은 산중에 혼자 버려진 것 같은 느낌에 두려워서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천동아!”
울먹이는 목소리로 재차 불러도 천동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울음보를 터트렸다. 천동은 더 이상 누이를 골려먹을 수가 없어서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누이가 알몸이라는 생각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울고 있는 그녀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알몸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대로 천동의 품에 안겨버렸다. 그녀는 여전히 울먹이면서 그에게 말했다.
“어디 갔었어?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미안해요. 잠시 소피를 본다는 것이 그만….”
얼떨결에 알몸인 누이를 안기는 했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의 일부가 반응을 하자 천동은 그녀를 힘주어 안았다.
“잠시만 이대로 있고 싶어요.”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가 없었다. 한여름 밤 야외에서 느끼는 감정은 남달랐다. 감정이 생각보다 많이 들뜨게 되고, 청춘의 밤은 주위의 공기마저 뜨겁게 데웠다. 그렇게 둘은 밤이 깊도록 서로를 확인하다가 새벽이슬이 내리는 동틀 무렵에서야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집으로 돌아왔다.
1595년은 일 년 내내 전란의 와중에서 모처럼 찾아온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농사는 정직한 것이어서 땀 흘린 만큼의 수확을 가져다준다. 천동과 동무들이 지은 열 두락의 논에서는 다른 논보다 훨씬 알차게 벼 이삭이 영글어 있었다.
자신이 팔아버린 논의 상황이 궁금한 김 초시는 송내마을에 있는 논으로 구경을 나왔다가 누렇게 고개 숙인 벼들을 보고 다시금 심기가 불편해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반드시 저 논을 다시 찾아야 한다.’
김 초시는 어금니를 꽉 물며 속으로 다시 다짐을 했다. 논을 넘긴 대가로 받은 물건들은 팔아서 집을 보수하고, 노비도 한 명 사고 먹을 양식도 장만하여 정말 요긴하게 잘 썼지만, 먹고 살만하니 다시금 탐욕이 살아나서 그를 괴롭혔다. 기름진 땅을 내준 아쉬움이 워낙 커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마을을 어슬렁거리며 생각에 몰두하다가 젊은 아낙을 발견하고는 호기심에 마당 안을 기웃거렸다. 기대와는 달리 관심을 가질만한 점이 없자 발길을 돌리려고 하는데 방 안에서 천동이와 패거리들이 몰려나오며 젊은 아낙에게 말했다.
글 : 지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