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열의 고용노동이슈(30)]생산성과 신뢰로 여는 노사관계 새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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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열의 고용노동이슈(30)]생산성과 신뢰로 여는 노사관계 새 기준
  • 경상일보
  • 승인 2025.10.10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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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열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 한국생산성학회 회장

한국의 노사관계가 제도 전환의 문턱에 섰다. 노조법 개정으로 교섭 권한과 책임의 지형이 바뀌고, 근로시간과 정년 제도 논의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현장의 판단 여지는 넓어졌지만 예측가능성은 오히려 낮아졌다. 규범은 강화되는데 실행 설계가 뒤따르지 않으면 분쟁은 법정으로, 비용은 시장가격과 환율로 되돌아온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강한 구호가 아니라 더 정교한 운영 디자인이다.

핵심은 균형이다. 노동자의 권리를 실질화하되 기업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분명히 하고, 교섭 구조를 확장하되 책임의 경계와 절차를 명확히 해야 한다. 원하청 협력 사슬은 한국 제조와 서비스의 생명줄이다. 제도 변화가 상생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려면 공동사실에 대한 확인, 의제별 교섭 분리, 분쟁의 사회적 비용 산정 같은 실무 가이드가 표준이 돼야 한다.

근로시간 단축 논의는 삶의 질을 개선할 기회이면서 생산성 시험대다. 주 4.5일제 시범 적용이 넓어질수록 조직은 같은 시간 대비 더 많은 부가가치를 내야 한다. 회의의 길이와 빈도, 표준작업과 자동화, 납기 신뢰와 품질 무결점이 동반되지 않으면 단축은 곧 인건비 상승과 마진 악화로 연결된다. 제도는 목표이고, 생산성은 수단이 아니라 조건이다.

정년 연장 이슈는 숙련의 보존과 세대 균형이라는 두 축에서 다뤄야 한다. 연령만 늘리고 임금곡선이 그대로라면 인건비의 경직성이 높아지고 청년 채용의 숨통은 더 좁아진다. 직무와 성과를 기준으로 보상 구조를 재설계하고, 계속고용의 다양한 경로를 열어야 제도가 사회적 비용을 줄인다. 고령 인력은 안전과 품질, 기술 전수의 허브가 되고, 청년 인력은 데이터와 자동화, 신사업에서 주도권을 가지는 역할 분화가 현장의 생산성을 끌어올린다.

정부의 책무는 공정한 심판과 데이터 설계자에 있다. 특정 진영의 언어로 정책을 설명하는 순간 대화는 끊기고 현장은 소송으로 흐른다. 업종과 규모, 고용형태별 쟁의 빈도와 지속기간, 납기 이탈과 고객 클레임, 단기와 중기 생산성 변동을 지표화해 공개해야 한다. 투명성은 극단을 약화시키고 합리적 타협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인프라다.

기업은 교섭과 재무를 연결해야 한다. 분쟁의 확률과 파급효과를 수치화해 이사회 리스크 관리 안건으로 상시 상정하고, 현장 데이터로 운영 의사결정을 갱신해야 한다. 임금과 직무, 평가가 따로 노는 구조에서 생산성은 우연이 된다. 역량에 기반한 보상, 목표에 연동된 팀 운영, 데이터에 근거한 근무 설계가 결합할 때 근로시간 단축과 임금 보전의 양립이 가능해진다.

노동계의 전략도 변해야 한다. 사회적 신뢰는 요구의 명분이 아니라 해법의 실현 가능성에서 나온다. 산별 교섭의 제도화, 특수고용과 플랫폼 노동의 보호, 작업중지권의 실효성 강화는 시대가 요구하는 의제다. 이를 성과로 만들 통로는 대화 복귀와 증거 기반 협상뿐이다. 현장의 안전과 품질, 납기 준수에 대한 책임 공유는 협력적 노사관계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공공 부문과 지방정부의 역할도 가볍지 않다. 주4.5일제 시범사업은 정책 실험이 아니라 산업 정책의 전초기지다. 업종별로 다른 생산성 함수와 고객 수요를 반영해 모델을 다변화하고, 성과와 비용의 결과를 투명하게 공유해야 민간 확산의 동력을 얻는다. 지역 기반의 중소기업에는 전환 비용을 흡수할 지원 패키지가 필요하다. 스마트 공정, 디지털 협업, 표준작업 교육이 결합한 묶음형 지원이 가장 효율적이다.

사회적 대화의 재가동은 의미가 크다. 불신이 쌓인 탁자라도 다시 앉아야 설계가 시작된다. 절충의 순간마다 원칙이 흔들리지 않도록 성과 지표를 합의하고, 갈등의 불씨를 키우지 않도록 해석의 여지를 좁히는 문장을 선택해야 한다. 제도는 법률의 조항으로 시작되지만 현장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절차와 문화다.

노사관계의 의제는 점점 더 경영 전략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다. 인구 구조 변화, 기술 전환, 통상 환경의 변동은 노사 모두에게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생산성과 유연성, 안전과 신뢰를 함께 끌어올릴 수 없다면 그 어떤 제도도 오래가지 못한다. 반대로 데이터를 공유하고 절차를 표준화하면 갈등은 관리 가능한 변수가 된다.

지금 요구되는 리더십은 속도의 정치가 아니라 설계의 행정, 선명한 구호가 아니라 보이는 성과다. 교섭의 장에 들어가는 모든 이해관계자는 자신의 요구를 숫자로 설명하고, 상대의 우려를 제도 문장으로 받아 적을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대화의 기술을 국력으로 격상시키는 일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작은 합의의 누적에서 시작된다.

한국 경제가 다시 도약하려면 노사관계의 운영체계를 한 단계 올려야 한다. 제도 변화의 에너지를 갈등의 연료가 아니라 혁신의 촉매로 바꾸는 능력, 그것이 새로운 경쟁력이다. 법은 최소한의 울타리이고, 거버넌스는 지속가능성의 조건이다. 대립의 악순환을 끊고 협력의 선순환으로 전환하는 길은 멀지 않다. 오늘의 생산현장, 오늘의 사무실, 회의실에서 시작된다. 갈림길에서 선택은 분명하다. 표결로 가를 것인가, 설계로 합의할 것인가. 후자를 택하는 나라가 위기를 기회로 바꾼다. 지금이 그 분기점이다.

윤동열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 한국생산성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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