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 동구 슬도 성끝마을 일대에 서식하는 너구리 가족이 최근 낮 시간대에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 주로 밤에만 목격됐지만, 최근 들어 대낮에도 나타나 주민과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지난달 말 성끝마을을 찾은 사진작가 A씨는 골목길 한복판에서 성체 너구리 한 마리를 목격했다. 너구리는 사람들을 크게 의식하지 않고 해녀집 앞마당까지 들어서는 등 자유롭게 골목을 누볐다.
A씨는 “사진을 찍으러 자주 슬도를 찾는데, 대낮에 너구리를 본 것은 처음”이라며 “배가 고픈 줄 알고 사과 조각을 던져줬지만 먹지도 않고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다시 대왕암공원 쪽으로 사라졌다”고 설명했다.
주민들에 따르면 슬도에 주로 나타나는 너구리 가족은 어미와 새끼를 포함해 7마리 정도로 추정된다. 이들은 몇 년 전부터 슬도 인근에 서식하며 마을에 내려왔고, 최근에는 낮 시간대에도 종종 목격되고 있다.
성끝마을 주민 B씨는 “처음에는 주둥이가 짧은 들개인 줄 알았다”며 “밤 12시 이후 무리 지어 다니는 모습을 자주 봤는데 요즘은 낮에도 나타나 놀랐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 C씨는 “너구리 새끼가 자라 성체가 되는 모습까지 쭉 지켜봤다. 이제는 마을에서 만나도 낯설지 않다”고 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너구리는 울산 전역에 널리 분포하는 흔한 야생동물이다. 태화강 국가정원이나 주택가 고양이 급식소 주변에서도 종종 관찰되며, 잡식성이고 번식력이 좋아 매년 구조되는 포유류 개체로는 고라니 다음으로 많다.
다만 야행성인 너구리가 이처럼 사람이 많은 낮 시간대 도심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크게 두 가지 원인을 꼽는다.
첫 번째는 질병이다. 최근 국내 너구리 사이에서는 개선충 감염 사례가 늘고 있다. 이 기생충에 감염되면 피부병이 생기고 털이 빠지면서 체온 조절이 어려워져 햇볕을 쬐기 위해 낮에 활동하기도 한다.
실제로 지난 7월에는 HD현대중공업 내부에서 병든 너구리가 발견돼 동구가 구조에 나서기도 했다.
두 번째는 시기적 요인 때문이다. 너구리는 보통 5월에 출산하고, 그해 가을인 9~10월 무렵 성체로 성장해 어미로부터 독립한다. 이 과정에서 무리에서 떨어진 어린 개체가 길을 잃거나 새로운 서식지를 찾아 이동하다 낮에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울산시 야생동물구조관리센터 관계자는 “너구리는 우리 주변에 흔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야행성이고, 건강한 개체는 민첩하며 경계심이 강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며 “사람 눈에 발견되는 경우는 대체로 병이 들었거나 독립 과정에서 길을 잃은 새끼일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내에서 광견병 발생 위험은 매우 낮지만, 접근 시 물림사고 가능성이 있고 다른 동물에 피해를 줄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은정기자 k2129173@ks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