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수 변호사의 울산, 법 이야기(1)]압류돼도 권리의 주인은 채무자다…25년 만에 바뀐 판례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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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수 변호사의 울산, 법 이야기(1)]압류돼도 권리의 주인은 채무자다…25년 만에 바뀐 판례의 의미
  • 경상일보
  • 승인 2025.1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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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성수 변호사

최근 대법원이 25년 만에 종전 입장을 변경한 판결을 선고했다(대법원 2025년 10월23일 선고 2021다252977 전원합의체 판결). ‘압류·추심명령이 내려진 채권에 대해 채무자는 더 이상 당사자가 될 수 없다’는 기존 판례를 뒤집고, “압류·추심명령이 있더라도 채무자는 여전히 당사자적격을 유지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민사집행 실무에서 거의 상식처럼 여겨지던 법리가 바뀐 셈이다. 이번 판결은 단순한 절차상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활동 속에서 권리의 실질적 주체를 누구로 볼 것인가라는 중요한 물음을 던진다.

압류·추심명령은 채권자가 채무자의 제3채무자에게 가지는 채권을 대신 받아내기 위한 법원의 명령이다. 예를 들어 A가 B에게 1000만원을 빌려주었고, B가 갚지 않자 A가 법원에 신청해 B의 거래처 C에게 “B에게 줄 돈을 나에게 달라”고 명령을 받는 것이다. 이때 C는 B에게 돈을 지급할 의무가 있으니, 법원은 이를 압류하고 A에게 추심권을 부여한다. 겉보기에는 채권이 A에게 넘어간 듯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채권의 ‘집행권한’만 이전된 것이다. 채권의 주체, 즉 법률상 권리자는 여전히 B이다. 이 점이 그동안 혼동을 낳았다. 종전 판례에 따르면 B는 더 이상 자신의 채권과 관련된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고 해석되었다. 그러나 실제 거래관계에서는 B가 주체로 나서야 하는 경우가 많다. 대법원은 바로 이 현실적 불합리를 해소한 것이다. 즉, 압류되었다고 해서 채무자가 법적으로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며, 채권의 실체적 귀속은 여전히 채무자에게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울산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이 판결의 의미가 더욱 크다. 울산은 조선·자동차·화학산업을 기반으로 한 대표적 산업도시다. 협력업체와 원청 간의 외상거래, 하도급 대금, 근로자 임금채권 등 다양한 금전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예컨대 하도급업체가 원청으로부터 받아야 할 공사대금이 다른 채권자에 의해 압류된 경우, 과거에는 그 하도급업체가 공사대금 관련 분쟁의 소송당사자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소송이 각하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판결 이후에는 그 업체가 직접 계약상의 권리와 책임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근로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급여가 압류된 근로자라 하더라도 근로계약의 당사자는 여전히 본인이다.

회사와의 임금이나 퇴직금 문제, 근로조건에 관한 다툼이 있을 때 근로자는 자신의 이름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압류되었다는 이유로 회사가 “이미 채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며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판례는 노동자 보호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각 당사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먼저 채권자 입장에서는 추심명령을 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채권이 확정적으로 자기 것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제3채무자와의 지급 또는 합의 과정에서 법적 근거를 명확히 확보하지 않으면, 나중에 채무자와의 분쟁에서 손해를 볼 수 있다. 채무자 입장에서는 압류가 되었다고 해서 “이제 내 일 아니다”라며 손을 놓아서는 안 된다. 여전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방어할 절차적 지위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제3채무자 입장에서는 법원의 명령 내용과 송달 시점을 정확히 확인한 뒤 지급해야만 중복지급 등의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자칫 서둘러 한 번 잘못 지급하면, 같은 돈을 다시 내야 하는 곤란한 상황이 생길 수 있다.

결국 이번 판결은 집행 절차가 실체법상의 권리관계를 대체하지 않는다는 민사법의 기본 원리를 확인한 것이다. 압류나 추심은 어디까지나 집행상의 절차일 뿐, 권리의 본질적 귀속을 바꾸지는 않는다. 경제적 관계가 복잡한 울산 같은 산업도시에서는 이러한 법리의 변화가 현장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기업 간 하도급 대금, 근로자 임금, 협력업체 미수금 등 현실적 분쟁 속에서 이번 판례는 절차적 오해로 인한 불필요한 소송을 줄이고, 권리관계의 명확성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25년 만의 판례 변경은 단순한 법리 수정이 아니라, ‘권리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압류·추심명령이 내려져도 권리의 주인은 여전히 채무자다. 법은 집행의 효율보다 사람의 권리를 먼저 본다. 복잡한 채권사회 속에서 이번 판결은 우리 모두에게 ‘법은 결국 생활의 문제’임을 다시 일깨워준다.

강성수 변호사

※외부원고는 본보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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