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안전은 지식이 아니라 습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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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시론]안전은 지식이 아니라 습관이다
  • 경상일보
  • 승인 2025.1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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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일 한국폴리텍대학 울산캠퍼스 AI산업안전시스템과 교수

최근 산업 현장에서 무너짐 사고, 밀폐공간 질식 등 반복되는 중대재해가 이어지고 있다.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대책이 쏟아지지만, 현장의 근본적 변화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한다. 산업안전보건법을 통해 교육과 절차를 의무화하고 있음에도 한국은 여전히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상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의 배경에는 우리 사회 전반에 남아 있는 ‘빨리빨리’ ‘이 정도면 괜찮겠지’라는 관행적 사고가 자리한다. 안전은 절차를 생략하거나 대충 처리하는 순간 가장 먼저 무너진다. 눈앞의 편함이 미래의 위험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나 안전의식은 성인이 되어 단기간 교육을 받는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중요한 출발점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익히고 반복한 절차 중심의 안전 습관이다. 유치원 시절 우리는 길을 건널 때 손을 들고, 횡단보도 앞에서 좌우를 확인하며, 차가 완전히 멈춘 것을 확인한 뒤 움직였다. 이 단순한 반복은 “확인하고 행동한다”는 절차적 사고를 몸에 새기는 중요한 경험이었다. 유아기 카시트 사용도 마찬가지다. 아이는 불편해 울고 벗어나려 하지만 부모는 “벨트를 해야 출발할 수 있어”라고 달래며 반드시 착용시킨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기준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 이후 자라면서 안전벨트를 매는 것이 당연한 행동이 되는 것처럼, 어린 시절의 반복된 절차는 다양한 위험상황을 예방하는 강력한 안전 기반이 된다.

일본의 사례는 절차적 습관의 중요성을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지진이 일상적인 나라에서 아이들은 어린이집, 학교, 지역사회에서 지진·화재·해일 대피훈련을 정기적으로 반복한다. 단순히 “이렇게 하라”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몸이 자동으로 반응할 수 있을 만큼 절차를 익히는 것이다. 성인이 된 후에도 지역 단위의 재난 대비 훈련이 이어져 실제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체계적인 행동이 가능해진다. 결국 안전을 실질적으로 지탱하는 힘은 강력한 법규 자체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축적된 반복과 습관화다.

반면 우리나라는 교육이 형식적으로 끝나거나 절차적 행동이 몸에 자리 잡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현장에서 자연스러운 안전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성인이 되어 처음 접하는 산업안전 수칙은 종종 복잡하고 번거로운 규정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안전벨트를 해야 출발할 수 있다”는 경험을 내면화한 사람에게는 산업 현장에서 “안전해야 업무를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이 훨씬 자연스럽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절차적 경험이 성인의 산업안전 감수성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구호나 더 강한 규제가 아니다. 가정·학교·지역사회에서 유아기부터 절차 중심의 안전 습관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도록 돕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안전은 ‘지키라’고 외친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몸이 절차에 맞춰 가는 시간이 쌓일 때 비로소 습관이 된다. “괜찮겠지”가 아닌 “한 번 더 확인하자” “빨리빨리”가 아닌 “천천히 안전하게”라는 태도가 일상에 자리 잡을 때 우리는 더 안전한 대한민국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결국 어린 시절 길러진 절차 중심의 습관은 성인이 되어 산업 현장에서의 안전 실천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되며, 우리 모두의 생명을 지키는 가장 단단한 기반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한 세대의 노력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장기적 과제다. 어린 시절 몸에 밴 절차의 습관화는 결국 산업안전의 토대이며, 우리 사회가 중대재해를 줄여 가는 가장 현실적이고 지속 가능한 해법이다. 작은 행동 하나라도 반복될 때 생활은 달라지고, 생활이 달라질 때 산업안전의 수준도 달라진다.

안전한 사회는 법으로 강요되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손들고 길 건너기에서부터 성인의 작업 전 안전점검까지 이어지는 삶의 과정 속에서 완성된다. 오늘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하나의 절차가 내일의 산업안전을 지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안전은 거창한 구호가 아닌 일상의 작은 선택에서 시작된다. 그 선택들이 쌓일 때 비로소 모두가 안전한 대한민국이 완성된다.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지금이 변화의 적기다.

이정일 한국폴리텍대학 울산캠퍼스 AI산업안전시스템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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