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지자체와 공공부문은 앞다투어 탄소중립 성과를 발표하며 ‘넷제로’라는 장밋빛 구호를 내걸고 있다.
중앙정부 기조에 맞춰 계획을 세워 실행에 나섰다고 하지만, 지역 여건에 비해 과도하거나 기반이 받쳐 주지 못해 실질 이행이 요원하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특히 에너지 다소비 산업이 밀집한 지역에서는 이런 선언이 산업 현장의 부담과 정책 불확실성을 키우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탄소중립은 이제 선의만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의제가 아니다. 기후 위기 대응 자체에 이견은 거의 없지만, 그 사실이 어떤 형태의 급진적 정책도 정당화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산업계가 체감하는 부담은 이미 상당하다. 에너지 다소비 업종은 설비 효율화·공정 전환 투자와 ESG·공급망 규범, 온실가스 규제 비용까지 복합적 부담을 지고 있다.
여기에 지방정부 차원의 ‘더 빠른 감축’ 요구가 겹치면, 기업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속도로 전환을 강요받는 셈이 된다.
해외 사례는 균형을 잃은 전환이 어떤 후유증을 낳는지 보여준다.
유럽은 누구보다 먼저 녹색 전환의 깃발을 들었지만, 에너지 가격과 공급 안정성을 둘러싼 논쟁이 산업 경쟁력 문제와 직결되며 거세졌다. 재생에너지 비중을 크게 높이는 동안 전력망 보강과 백업 전원, 인허가 체계가 따라붙지 못해 일부 지역에서는 전기요금 상승과 공급 불안이 동시에 나타났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환 방향에는 공감대가 넓지만, 속도와 수단 설계가 미흡하면 ‘좋은 목표’가 ‘높은 비용’으로만 인식되는 순간이 얼마나 빨리 찾아오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기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 병목이 에너지 인프라, 그중에서도 전력망이다. 데이터센터 등 AI 시설은 전력 문제를 드러내는 직접적인 경고다.
일부 국가는 전력망 여유가 부족한 지역에서 신규 데이터센터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거나 접속을 제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녹색 전환과 디지털 전환이라는 두 과제가 동시에 밀려들면, 병목은 결국 산업 현장에서 터질 수밖에 없다. 에너지 인프라는 전환 정책의 배경이 아니라 본문이 되어야 한다.
반면 주변국은 다층적 전략을 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은 태양광·풍력 보급을 늘리면서도 원자력 재가동에 속도를 내고, 석탄·가스 발전에는 암모니아·수소 혼소와 CCUS 실증을 병행한다. 완벽한 해법은 아니어도 “사용을 멈추기 전에 줄일 수단부터 마련한다”는 발상은 선언보다 수단의 포트폴리오를 먼저 묻게 만든다.
정부 역시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탄소중립 목표를 법제화하고 중장기 계획과 로드맵, 투자와 기업 지원 체계를 내놓고 있다. 그럼에도 현장의 체감 온도는 다르다.
중소 제조업은 전환 비용을 감당할 여력도, 필요한 인력과 기술을 준비할 시간도 부족하다고 토로한다. 대기업이라고 사정이 크게 다르진 않다. 글로벌 공급망 규범과 막대한 설비 투자 부담이 겹치며, 여유가 아니라 압박에 가까운 전환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감축 목표의 높이를 논의하는 것 못지않게, 그 목표를 언제·어떤 속도로·어떤 재정과 제도로 뒷받침할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탄소중립은 단기간에 끝낼 수 있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장기적 시야 속에서 산업과 지역이 감당 가능한 속도로 단계적 이행 경로를 설계해야 한다. 국가 경제의 뼈대를 이루는 산업 현장에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을 지우는 전환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전기요금 급등과 공급 불안이 투자 위축과 고용 감소로 이어지는 순간, 탄소중립은 미래 세대를 위한 약속이 아니라 불안으로 변질된다. 결국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구호가 아니라 더 촘촘한 실행이다. 에너지 믹스의 다변화, 전력망·계통 투자와 저탄소 공정 전환을 위한 R&D·실증, 전환 비용 완충 장치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탈탄소는 특정 업종이나 기업 집단의 희생으로만 이룰 수 없는 만큼, 목표의 크기를 경쟁하기보다 전략의 완성도를 경쟁해야 한다. 탄소중립이 산업 붕괴가 아닌 산업 전환의 동력이 되려면,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높은 숫자가 아니라 더 정교하고 균형있는 설계다.
구태훈 KAIST 기술경영전문대학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