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따뜻한 것을 찾는 계절이 됐다. 에어컨 아래에서 냉커피를 마신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따뜻한 햇살을 기다리는 날씨로 바뀌었다. 수시로 변하는 마음이지만 겨울 추위 속의 따뜻함이 여름 더위 속의 서늘함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 들수록 한여름의 에어컨 바람보다 겨울 창가의 햇살이 주는 온기가 훨씬 편안하다. 더위를 피해 찾아드는 커피숍의 냉기는 한여름에도 조심스럽다. 그러나 겨울 창가에 비치는 햇살은 굳이 피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온화하다. 유리창이 큰 찻집을 찾아가면 어디에서나 누릴 수 있는 기분 좋은 경험이다. 지금이 바로 그런 계절이다.
가왕 조용필은 겨울 찻집의 정서를 이렇게 노래했다. ‘바람 속으로 걸어 갔어요 이른 아침의 그 찻집 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 외로움을 마셔요.’ 어두운 조명 아래서 부르는 노래로 기분을 낼 수도 있지만 강변에 있는 찻집에 앉으면 가사의 맛을 더욱 깊게 느낄 수 있다. 이 노랫말 하나만으로도 겨울 찻집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태화강 주변에는 고수부지를 따라 다양한 찻집이 늘어서 있다. 남쪽으로 창을 낸 찻집의 정취는 여름보다 겨울에 더 깊어진다. 커피 맛도 마찬가지다. 차광막을 내리고 찬 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냉커피보다는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을 느끼며 마시는 따뜻한 커피 맛이 훨씬 정겹다.
그러나 이러한 호사도 노년이 되면 점점 멀어져 간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먹기 위해서는 평안한 수면을 희생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대체 수단으로 등장한 디카페인 커피도 어느 때부터 부담스러워졌다. 마른 갈대꽃이 바람에 일렁이는 강변의 찻집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것도 일상의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늙어 간다는 것은 피해야 할 음식이 하나씩 늘어가는 과정이다. 특히 기호식품은 노년에 멀리해야 할 금기 식품일 경우가 많다. 커피가 그렇고 술이 그렇다. 커피는 피할 수 있으나 술은 멀리하지 못한다고 호소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혈액 검사표에서 빨간색 수치가 조금씩 늘어나도 완전히 끊어내기는 힘들다. 의사들의 지청구를 듣는 것도 주로 이것 때문이다.
노년이 되면 줄어드는 활동 영역에 맞추어 마음의 무게중심도 자연스럽게 변화돼야 하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사람 사이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멀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커피나 술도 사람 사이를 원활하게 하고자 마시는 음식이다. 그러나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자 마시는 술이 오히려 자신과 주위를 힘들게 하기도 한다. 노년의 술자리는 뒤가 그리 평안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다. 후유증이 심한 음식이다.
삶의 모든 단계에는 그 시기에 맞는 지혜가 있다. 특히 은퇴 후에는 남아도는 시간을 경영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아무런 변화 없이 흘러가는 시간 위에 자신만의 형식을 부여하는 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래야 외로운 느낌을 해소하려고 여기저기 사람을 찾는 일을 멈출 수 있다.
노년의 시간을 지키는 지혜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혼자 있는 시간에 대한 태도를 명확히 설정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긴장감이 사라진 시간에 대처하는 자신만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존경스럽다.
은퇴자들의 모임에서 가장 흔한 대화 주제는 뭐하면서 시간을 보내느냐는 것이다. 노년의 시간은 비슷비슷한 모습으로 흘러간다. 사람을 만나서 노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적막한 시간을 즐긴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아직도 타인과의 관계를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아가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반성한다.
사회적 관계의 밀도가 점점 낮아지는 지금이야말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하는 때가 아닌가. 노년의 시간은 사람과 사람 사이가 아니라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더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닌가. 겨울 찻집의 창가에 홀로 앉아 노년을 지켜나갈 지혜를 생각하며 이 글을 쓴다.
김상곤 칼럼니스트·철학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