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히 멀다고만 여겼던 ‘환경위기’가 이제 우리의 삶 한가운데로 성큼 들어와 있다. 기후변화라는 말도, 탄소중립이라는 구호도 더는 신문 한 귀퉁이나 교과서의 낱말이 아니다. 우리의 호흡, 우리의 밥상, 그리고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의 미래를 좌우하는 생생한 현실이다.
올해 들어 전 세계 곳곳에서 유례없는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다. 초여름부터 40도를 훌쩍 넘는 폭염이 남유럽과 남아시아를 강타했고, 미국 텍사스와 아리조나 사막지대는 마치 불가마처럼 달궈졌다. ‘불타는 행성’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할 정도였다. 반면 지구 반대편에선 기록적인 폭우가 도심을 집어삼키며, 한순간에 터전을 잃고 절망 속에 허우적대는 이들이 늘고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기상이변’이라 부르던 현상들이 이제는 평범한 일상처럼 반복된다.
왜 이토록 자연이 격렬하게 요동치는 걸까. 우리가 뿜어낸 온실가스, 우리가 소비한 에너지, 우리가 무심히 버려온 폐기물들이 모여 지구라는 집의 균형을 허물고 있다. 빙하가 사라지고, 바다의 수온이 올라가고, 숲이 잘려나간 자리에 불모지가 남는다. 한때 ‘지구온난화’라고 불리던 이 거대한 변화를 이제는 ‘기후위기’ 혹은 ‘기후붕괴’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놀라운 건 이 변화가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마존의 나무들은 탄소 흡수량보다 오히려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산호초가 하얗게 죽어가는 ‘백화현상’은 해양생태계 전체의 먹이사슬을 뒤흔들고 있다. 북극곰만이 아니라, 전 세계 수많은 생명들이 이미 이 위기를 뼈저리게 겪고 있다. 환경위기는 곧 생명위기다. 그리고 생명위기는 인간에게 되돌아온다. 우리가 마시는 물, 들이쉬는 공기, 식탁에 오르는 곡물과 과일 모두가 지구라는 하나의 시스템 안에 얽혀 있다.
그러나 어쩐지 이 이야기는 너무 크고, 너무 먼 일처럼 들리기도 한다. “내가 하나 바꾼다고 달라질까”라는 무력감은 여전히 많은 사람의 마음을 짓누른다. 그럼에도 희망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위기의 시대야말로 우리의 작은 선택이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기회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환경 담론은 ‘탄소중립’을 넘어 ‘생태적 전환’으로 확장되고 있다. 단순히 배출량을 줄이는 것을 넘어, 우리의 산업, 경제, 도시 설계, 생활 습관 그 자체를 자연의 순환 논리로 되돌리려는 시도다. 도시 곳곳에 늘어가는 공유 자전거, 친환경 건축물 인증, 제로웨이스트 숍, 식물성 대체식품의 유행은 모두 변화의 징후다. 아직 미미하고 일부 계층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이는 분명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환경부 발표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전국 탄소중립생활 실천 인구는 약 700만 명을 넘어섰다. 아직 갈 길이 멀어도, 거기엔 분명 미래로 가는 작은 불씨가 깃들어 있다.
자연환경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환경운동가의 일’이 아니라, 결국 우리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선택이라는 사실이다. 환경보전은 거창한 대의가 아니라 삶의 문제다. 깨끗한 공기, 건강한 물, 안전한 기후 없이는 경제도, 문화도, 행복도 허상일 뿐이다. 지구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자연은 한 번도 인간에게 적이 아니었다. 문제는 언제나 인간의 무지와 오만이었다. 지구가 보내는 경고음은 결코 자연의 보복이 아니다. 그것은 더 늦기 전에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꾸라는 마지막 신호다.
어쩌면 우리는 지구가 처음 맞닥뜨리는 ‘현명한 종(種)’일 수도 있다. 기술은 분명 문제를 일으켰지만, 동시에 해답이 될 수도 있다. 재생에너지, 에너지저장장치, 친환경 농업, 탄소포집기술(CCUS), 스마트 그리드 같은 혁신들이 이제는 조금씩 빛을 발하고 있다. 우리가 가진 마음가짐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전환의 열쇠다.
먼 미래의 아이들이 지금 우리의 시대를 어떻게 기록할지 생각해본다. ‘그들은 끝내 변화를 외면했다’는 비극적인 한 줄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그들은 마지막 순간에 함께 일어섰다’는 희망의 장으로 기록될 것인가. 답은 우리 모두의 손에 달려 있다. 우리의 작은 선택들이 모여, 다시금 지구가 푸르른 숨을 쉴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곧 우리의 숨이기도 하니까.
이문학 자유기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