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염포
염포는 북구 염포동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포구이다. 신라 때는 하곡현(河曲縣), 고려 때는 지울주군사(知蔚州郡事), 조선시대에는 울산군(蔚山郡)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염포라는 이름은 예로부터 소금밭이 많아 ‘소금 나는 갯가’라 해 붙여졌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염포진(鹽浦鎭)이 있어 수군만호가 주둔했다. 문헌상에는 이곳에 성이 있어 둘레가 1039척이 되고 성내에는 우물이 3개 있다고 했다.
1426년(세종 8) 부산포(富山浦)·제포(薺浦)와 함께 삼포에 왜관을 설치할 때 염포에도 일본인의 거주가 허락됐다. 삼포의 왜관 규모는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의하면 36호 120명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에 왜국 사절이 서울에 갈 때 염포에 상륙해 언양·경주·안동을 거쳐 가도록 정해, 염포는 좌로(左路)의 시발지가 됐다.
염포는 역사적으로 울산지역을 방어하는 군사기지였다. 태화강하구에 위치해 개운포·유포와 함께 울산의 좌병영을 지키는 수군의 군사기지였다. 조선시대에는 부근에 가리산(加里山)·천내산(川內山) 봉수가 있었으며, 동쪽 해안 지대에는 목장이 있었다.
2. 염포왜관
왜관은 일본인들이 조선에 머물면서 외교적인 업무나 통상하던 곳이다. 조선 정부는 1418년(태종 18) 3월, 내이포(제포), 부산포에 이어 염포와 가배량을 추가로 개항해, 내이포와 부산포의 왜관에 거주하던 일본인을 나누어 살도록 했다. 염포에도 일본인이 거주하는 마을인 왜관이 형성되고, 이곳으로 일본 사절이나 일본 상인이 출입하게 됐다.
1419년(세종 1) 6월, 조선 정부는 왜구를 근절할 목적으로 대마도를 정벌했다. 대마도 정벌에 나서면서 조선 정부는 왜관의 일본인을 각 지방 관청으로 나누어 예속시키고, 염포왜관(鹽浦倭館)을 폐쇄했다. 염포왜관이 재개된 것은 1426년(세종 8) 1월이다. 염포왜관을 다시 허락하기 전에는 제포와 부산포 두 포구에만 왜관이 있었는데, 대마도에서 무역 증대를 위해 두 포구에서만 무역을 하도록 하는 제한을 풀어 달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병조에서 경상도수군도절제사의 첩정(呈)에 의거해 아뢰기를, 부산포에 와서 거주하는 왜인이 혹은 상고(商賈)라 칭하고 혹은 유녀(遊女)라 칭하면서 일본 객인과 흥리 왜선이 이르러 정박하면 서로 모여서 지대(支待)하고 남녀가 섞여 즐기는데, 다른 포(浦)에 이르러 정박하는 객인도 또한 술을 사고, 바람을 기다린다고 핑계하고 여러 날 날짜를 끌면서 머물러 허실(虛實)을 엿보며 난언(亂言)해 폐단을 일으킵니다. 바라건대, 좌도(左道) 염포와 우도(右道) 가배량에다 각각 왜관을 설치해 항거(恒居) 왜인을 쇄출(刷出)해 나눠 안치해 거주하면서 살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태종실록> 1418년(태종 18) 3월 2일).
“예조참의 김효손(金孝孫)이 답서하기를, 말한바 사로잡힌 선척은 우리나라 변장(邊將)이 함부로 잡은 것이 아니라, 본조(本曹)에서 족하(足下)의 청으로 인해 상선(商船)이 왕래하는 내이(乃而)·부산(富山) 두 포구(浦口) 이외에 울산(蔚山) 염포에도 다니면서 장사할 수 있도록 아뢰었다. 위의 세 곳 이외에 만일 선척이 범람하면 그곳에 있는 진수(鎭守)가 그때그때에 체포하는 것이 그 직책이다.”(<세종실록(世宗實錄)> 1426년(세종 8) 11월 26일)
염포왜관의 모습은 <해동제국기>에 수록된 ‘울산염포지도’(1474)를 통해 알 수 있다. 왜관은 울산도만호(都萬戶)가 방어하는 성곽으로 둘러싸고, 조선 병력의 통제를 받게 돼 있었다. 울산만에서 태화강으로 들어가는 해안가에 왜관이 조성돼 일본 선박이 쉽게 왕래할 수 있었다. <해동제국기>에 기록된 염포왜관의 당시 인구는 36호에 131명인데, 15세기 통틀어 30~50호에 120~150명 정도가 왜관에 거주했다. 염포왜관은 일본인의 종교 생활을 위한 사찰도 있는 일본풍의 경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1493년(성종 24) 10월의 보고에 따르면, 왜관 내 객관(客館)이 너무 낡아 연회를 베풀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고, 일본 사절이 숙박하기도 어려워 항거 왜인의 집에서 머물기도 하고, 조선의 사찰에 머무는 일도 일어났다.
3. 가덕도 왜변과 염포왜관
염포왜관이 폐지된 직접적인 원인은 삼포왜란 때문이지만, 이런 조짐은 가덕도 왜변부터 시작됐다.
조선 정부는 처음에는 왜관에 머물던 일본인에 대해 유연한 자세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일본 사절의 왕래와 함께 물자가 몰려들자, 포소(浦所)에 설치된 왜관이 돈 벌기 좋은 곳으로 변모되면서, 밀무역과 정보 누설 같은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한반도 연안으로 왜적이 쳐들어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1506년(중종 1)에는 제주에 왜적이 나타나 사람과 가축을 죽이고 약탈했다. 1508년(중종 3)에는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왜적을 잡아 조선 조정에 바쳤다. 1508년 가덕도 왜변은 무력 충돌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으며, 그것이 절정에 달한 것이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이었다. 1508년 11월2일 왜적이 동래 가덕도에 침입해 그곳에서 벌목하고 있던 웅천 사람을 살해하고 옷과 식량을 약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 조정은 가덕도 왜변을 일으킨 왜인들이 조선말을 할 줄 알았으며, 큰 배를 타고 바람을 무릅쓰고 가덕도로 들어간 점을 들어서, 범인을 삼포 왜관에 장기 거주하는 항거 왜인(恒居倭人)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세 곳의 우두머리 왜인들 모두 가덕도 왜변이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부산포와 염포의 왜인들은 가덕도가 경상우도에 있고, 자신들은 경상좌도에 살고 있어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서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조선 조정은 왜적의 실체를 끝내 밝혀내지는 못했다. 이때의 일이 조선에 와서 살던 항거 왜인들을 통해 대마도주에게 보고됐을 터인데도, 가덕도 왜변의 범인들에 관한 기록은 그 뒤에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가덕도 왜변은 삼포왜란의 전조 현상으로서 주목된다. 가덕도 왜변 당시 범인을 밝혀내지 못했고,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져 2년 뒤인 1510년에 삼포왜란이 일어났다. 다만 삼포왜란은 대마도주의 지원을 받은 왜인들이 삼포에서 동시에 폭동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가덕도 왜변과 그 성격이 다르다.
송철호 한국지역문화연구원장 문학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