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군주의 배신 - 7장 / 정유재란과 이중첩자 요시라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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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군주의 배신 - 7장 / 정유재란과 이중첩자 요시라 (100)
  • 차형석 기자
  • 승인 2025.12.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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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당시 울산 무룡산과 주변 일대에서는 왜군과 의병 등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장편소설 <군주의 배신>의 주 배경이 되고 있는 무룡산의 일출. 울산시 제공

유곽을 멀찍이 벗어난 요시라는 숲속으로 내달렸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감시자를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안전을 확인한 그는 비로소 전서구를 날렸다. 이제 내일이다. 김응서에게 1월13일(음력)에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 수군이 부산포에 당도할 것이라는 정보만 넘기면 된다. 나머지는 조선의 대신들과 조선왕 이연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수군제독 이순신이 없는 조선 수군은 어떻게 될까?’

과연 고니시의 예상대로 될지 지켜볼 생각을 하니 요시라는 너무 흥분됐다.

‘재미있을 거야.’

그는 이 조선이라는 나라가 무척 흥미롭게 생각되었다. 일본인들보다 머리가 좋은 조선인들이 이런 얕은 반간계에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요시라는 저녁 무렵에 산에서 내려와서 미리 마련해 둔 또 다른 기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진시에 그는 다시 김응서를 만나러 갔다. 그는 하나코를 물러가게 한 후에 김응서와 마주했다.

“대감,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포에 당도하는 날은 1월13일(음력)이옵니다. 잊지 마시옵소서. 그리고 이번 일로 조정에서 포상을 하게 되면 소인의 이름도 반드시 넣어주셔야 합니다. 대감을 모신 아이는 일이 잘 끝나고 소인의 이름이 공신록에 오른 것을 확인한 후에 다시 대감께 보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소인의 공을 잊지 마시옵소서.”

이중간첩 요시라로부터 왜군의 동향에 대한 첩보를 입수한 김응서는 권율 장군을 통해서 그가 준 정보를 조정에 알렸다. 조정에서는 즉시 통제사 이순신에게 명하여 출병케 하였다. 가토가 부산포에 상륙하기 전에 반드시 적의 함선을 섬멸하라는 지시였다.

그렇지만 명령을 받은 통제사 이순신은 망설였다. 이 정보가 잘못된 것이라면 조선 수군은 부산 앞바다에서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가토군이 이미 상륙을 마치고 전열을 정비하여 조선 수군에 대항하는 한편 가덕도 쪽으로 조선 수군의 후미를 노리는 상황이라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가 고민하는 사이에 며칠이 훌쩍 지났다. 권율은 재차 수군의 출병을 재촉했지만 통제사 이순신은 확신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출병을 할 수가 없어서 수군을 움직이지 않았다.1597년 1월27일(음력), 도성인 한양에서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산해, 김응남, 윤두수, 김수 등 서인과 북인들이 주도한 이번 회의에는 주상과 류성룡이 참석했다. 이미 통제사 이순신을 모함하는 장계가 지난 1월22일(음력)에 도착하여 있었다. 어전회의는 한마디로 이순신에 대한 성토장이었다. 이순신의 죄목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열띤 회의를 한 결과 통제사 이순신의 파직이 결정되었으며, 2월4일(음력)에 사헌부에서 이순신의 죄에 대한 국문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주상에게 올렸다. 마침내 2월26일(음력)에 한산통제영에서 통제사 이순신은 체포되었고, 죄인 이순신을 실은 수레가 3월4일(음력)에 한양에 당도하였다.

글 : 지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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